소비자보호와 정부의 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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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소비자보호기본법을 제정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은 잘된 일이다.
첫째는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른 개발이익을 이제는 소비자에게도 충분히 환원시켜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둘째로는 상품·용역의 전문화·다양화 추세 속에서「소수」의 생산자가 자칫 전문지식이 없는「다수」의 소비자에 대해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소지가 증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소비자보호를 위한 제도적 강치는 이제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현대산업사회의 필수적 요청이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물가고를 헤쳐 나가기도 힘든 처지에 항상 부정·불량상품의 위 해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하에서는 국민생활의 안전과 복지향상이라는 기본적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의미에서도 소비자 보호기구를 법제도화 하려는데 대해서는 커다란 기대를 걸만도 하다.
정부가 법 시안에서 규정한 ⓛ안전 ②선택 ③인지 내지는 정보제공 ④의견반영의 권리 등이 하나같이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 나라에서의 소비자의 권리는 소외되어 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제도가 없어 이 같은 권리가 보호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물가안정과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비롯하여「공산품 품질관리법」「식품위생법」「전기용품안전관리법망」등 공산품의 품질관리·소비자 보호와 관련되는 갖가지 규정은 이미 20여 개가 넘는다.
물론 이들 법규는 1차적인 입법목적이 따로 있고 소비자 보호는 법 시행에 따른 부수적인 반사효과라고도 하겠지만, 철저한 이행이 뒤따른다면 소비자권익은 구태여 기본법의 제정이 아니고 서라도 상당수준 보호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본법자체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그 실효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는 법 시안의 내용도 반드시 만족스럽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우선 시안은 제1조에 소비자보호를 위한「정부·기업의 의무」를 정립한다고 돼 있으나 구체적인 조항에서 정부의 의무조항은 하나도 명시되지 않고 있다.
기업에는 상품에 대한 표시의무·소비자보호요원의 확보·여론조사 등은 의무화하고 있으면서 정부가 수행할 의무로서는 고작 소비자보호위원회를 설치, 운영한다는 것뿐이다.
68년 이와 동일한 법을 제정한바 있는 일본의 경우 사업자는 국가의 소비자관련시책에 적극 협력할 의무를 진다고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나머지 일은 국가가 전부 맡아 수행토록 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생산자 측에 대항하는 평형 역으로서의 소비자단체관련 조항에서 이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문에서 제 외국의 예는 대부분 국가가 소비자의 조직화에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의무화시키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시안은 단순히 단체를 결성할 수 있다고만 임의규정으로 처리하고 있다.
소비자단체가 실질적인 구실을 하려면 이러한 조직과는 별도로 상품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고용, 각종 상품의 시험·검사시설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쯤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할 수 있는바, 정부의 지원 없이 어찌 이 같은 업무의 수행과 그 공정성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또 정부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하여 분명한 규정을 결한 법이 제정된다면 그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는 것도 또한 자명하다. 오히려 정부는 생색만 내고 소비자보호의 책임을 기업과 소비자 스스로에게 전가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씻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기본법이 정부안으로 확정되는 과정에선 마땅히 정부의 의무 및 그 역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넣도록 근본적인 손질이 가해져야 할 것이다.
소비자보호는 본질적으로 법 제정보다는 정부 및 각성된 소비자단체들의 의지와 행동력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든 상품·용역의 생산과 제공 과정에서부터 원천적으로 불공정거래를 방지하고, 소비자보호를 제1차적인 의무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산업정책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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