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화의 접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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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약은 고대로 인체의 건강을 지켜 주고, 생활을 즐겁게 해주는 초근목피라 하여 그 글자도 초두 밑에 약자를 결합시켜 이루어 졌다.
그러나 요즘엔 약국에서 판 변비약 속에 쥐약이 섞여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등, 약을 사 먹는 것 자체가 두렵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고의건, 실수에 의한 것이건, 약국에서 사먹은 약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 같은 참사는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기에 약화 문제를 그때그때 그 당사자의 처벌만으로 미봉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소이가 있다.
최근만 하더라도 지난 6월 15일 부산에서 약국의 처방약을 먹고 30대 부인이 숨진데 이어 지난달 14일에는 광주에서, 20일에는 충북 단양에서, 그리고 21일에는 다시 부산에서 같은 성질의 약화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것이다.
독극물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독극물 판매 및 소분업소는 관할 시·도로부터 판매·제조 허가를 받아 등록을 마친 뒤 바로 독극물 관리자를 두고 철저한 관리 지도 아래 영업을 해야 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전국1백40개소의 등록업체는 물론, 수백 개소에 이르는 일반 화공약품상에서 까지 허가도 없이 독극물을 함부로 다루고, 대부분 관리자도 형식적으로만 둔 채 영업을 해 오고 있음은 공연의 비밀이다.
말썽이 된 부산의 항도화학공업사의 경우만 하더라도 독극물 취급자를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면허를 월1만원씩에 빌어 15세 소녀에게 독극물 소분을 맡겨 온 것이 드러났다.
독극물 관리자의 지도 감독을 전혀 받지 않은 소녀는 독약과 변비약을 구별하지 못한 채 황산「마그네슘」대신 쥐약 원료인 염화「바륨」을 포장 속에 넣었던 데서 뜻하지 않은 비명횡사의 참극을 불러온 것이다.
독극물 판매 과정의 빈 구석은 일선 약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약은 전문지식과 자격을 가진 약사조차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취급하지 않으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참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의약의 지식이 전혀 없는 종업원이 약을 팔거나 심지어 구멍가게에서 일반 상품 팔 듯이 소년 고용원이 고객들에게 약을 집어 주고 있는 사례마저 비일비재하게 빚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약국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아무리 약사법에 소분업 제도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도 적어도 이토록 부실한 소분과 허술한 판매 행위가 방지되도록 제도적 안정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약사 행정의 당면한 책임이자, 최소한도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약의 제조 소분은 어디까지나 제약회사의 책임 아래 마무리 짓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조치이며, 아울러 독극물 감시원에 대한 철저한 감독 조처도 약사 행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당위에 속한다 할 것이다.
하기야 현행법상으로도 독극물 감시원은 독극물 영업자에게 필요한 행정 조치를 명하고 독극물 취급 장소에 부단히 출입하면서 시설 감사·안전 점검·제품 수거 등을 맡도록 돼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독극물 감시 고유 업무를 맡는 감시원은 전국에 단 한 명도 없는 실정이니 이를 어찌 당국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업무는 모두 약사 감시원에게 겸임 위촉되고 있다. 그나마 약사 감시원도 전국적으로 4백9명에 지나지 않고 그중에는 임시직원이 1백98명이며 자격을 갖춘 약사는 고작 74명 뿐 이라 한다.
이 인원으로 전국 2만3천8백20개에 이르는 약국·약종상·한약업소 등 대상 업소에 대한 감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약사 감시 기능의 강화와 감시원의 인원 확보 및 자질 향상은 이런 관점에서 보사 행정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의료 시혜와 보험 제도가 실시됐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의 약국 이용률은 60.7%에 이르고 있는 것이 최근의 의약 통계다. 이처럼 약이 의원의 주역으로 국민 보건과 직결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인명을 다스리는 약사 행정의 혁신과 더불어 보건 의약 업계의 철저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할 줄 안다. 약은 결코 영리적으로만 거래될 상품 아니다. 질병 치료에 불가결 한 생명 유관 상품이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는 것은 약사의 성스런 책임이며 사명임을 각성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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