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의 국정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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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잉크」 냄새조차 향기롭기만 하던 새 교과서의 감촉-. 입학식·개학식이 끝난 뒤 산뜻하고 알찬 내용의 새 교과서 뭉치를 받아들고 흐뭇해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성인이 된 다음에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감격적인 추억의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교과서가 청소년들의 정신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라 함은 중언할 필요가 없다. 감상을 떠나 실제 교육현장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적어도 초·중등학교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다름 아닌 교과서라는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론이 없을 줄 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선 그 교과서에 얽힌 불만이 쉴 사이 없고, 그것을 에워싼 부정이 또한 꼬리를 물고 있었음은 어찌된 일인가.
교과서하면 좋은 지질, 선명한 인쇄, 산뜻한 장정, 저렴한 가격 등이 그 어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요건이지만, 그중에도 특히 그 내용의 충실성·포괄성·체계성 등이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권위있는 저자에 의한 독창적인 연구업적이 전체교육과정과의 유기적 연관 아래 단계적·체계적으로 이로정연하게 서술된 교과서-. 이것이 곧 모든 교과서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교과서란 어떤 것인가. 그런 교과서의 편찬은 무엇 보다 되도록 많은 학자들의 경쟁적 노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해야할 것이다. 이는 곧 완전히 자유로운 경쟁적 조건하에서 채택되어 다시 현장교육의 검증을 통해 그 우수성이 입증된 교과서라야만 비로소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다는 대 원칙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8일 문교부가 발표한 각급 학교 교과서의 개편계획은 우선 이 대 원칙에 어긋난 것임을 부인키 어렵다. 문교부는 이 계획에서 ⓛ국민학교·중학교 및 실업학교의 모든 교과서를 국정화 하기로 한 것 외에도 ②인문고교 일부 국책과목의 국정화 ③현재 시행되고 있는 단일본 검인정교과서의 복수본화 ④교과서 출판업자의 자격 요건 강화 등 주목할만한 내용을 담고있다. 얼마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검인정교과서 부정」과 같은 부조리를 없애고 의무교육의 확대에 따르는 교과서 값의 저렴화를 기한다는 것 등이 그 명분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 공급에 수반되는 부조리를 막기 위해 인문고교의 19개과목을 포함한 국민학교·중학교·실업고교의 전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
뿐더러 이 계획의 강행은 자칫 교과내용의 위험한 획일화·경직화를 불가피하게 하고, 그 밖에도 교과서에서의 오자·탈자 등 사찬의 위험이 더욱 증대된다는 것을 너무도 경치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 같은 발상은 전술한바 교과서 편찬에 있어서의 「대 원칙」이라 할 근본문제를 한낱 「편의」나 「기술적인 고려」 아래 종속시키려는, 본말전도일 뿐더러 한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나라 편수행정으로써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스스로 모르는체 외면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자. 한마디로 교과서 편찬이라고 하지만 당국은 그내용을 1,2종으로 분류, 그 편수를 대폭 축소한 후에도 무려 6백68종이나 되는 것이 현행 교과과정이거늘, 이 방대한 책수의 교과서를 어떻게 기껏 수십명에 불과한 행정직교육연구관들이 충실하게 집산·감수·사문·편수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설사 그 작업의 대부분을 외부인사에게 위촉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여건하에서 어찌 그들이 자기자신의 단독 책임아래 경제적 동기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경우처럼 최선을 다한 교과서 편찬에 협조할 수 있을 것인가.
끝으로 그러나 가장 중대한 문제는 문교부의 이 같은 계획이 우리나라 학문의 다양한 발전을 원천적으로 저해하고, 많은 학자 및 전문가들로부터 교과서 저작에의 참여 기회를 의식적으로 봉쇄하는 역기능을 할 위험이 크다는데 있다. 이는 곧 자유경쟁을 통한 교과서의 질적 향상의 길을 막고, 폐쇄적인 국영기업체의 경우처럼 도리어 교과서 값의 앙등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위험을 내재하는 것은 아닐까. 재삼 숙고하여 재검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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