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층 '투자 이민'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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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재산·근거지 두는 '이중생활' 늘어
피지·몰타 등 휴양지 등으로 관심지역 확산

몇년 전부터 미국.캐나다 등 주요 국가들이 이민 요건을 강화하면서 한동안 주춤했던 해외 이민이 최근 중상층을 중심으로 다시 늘고 있다.

월별 해외이주 신청자는 지난해 12월 7백20명에서 올 2월 9백26명으로 증가했다. 월별 신청자는 2000년 평균 1천2백여명, 2001년 평균 9백60여명 등으로 꾸준히 줄어오다 지난해 12월 최저점에 이른 뒤 올 1월부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 이민 패턴 변화=요즘 국내에 재산과 근거지를 놔둔 채 외국 현지에 새로 생활 근거를 마련하는 '이중생활형' 이민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캐나다 이민을 준비 중인 피부과 전문의 李모(38)씨는 서울 강남에 갖고 있는 피부클리닉을 팔지 않고 대학 후배에게 맡겨 운영할 계획이다. 이민 실패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C은행 서울 강남지점 고객관리센터의 경우 이민 후 국내에 남겨둘 자산의 운영에 관한 상담이 최근 두 배로 늘었다.

이민층이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연령도 청.중년층에서 장년층으로 옮겨가고 있다.

서울 N이민대행 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이민의 상담.계약건수가 30% 이상 늘었다. 상담자 대부분은 강남.분당 등지에 사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자녀 교육이나 쾌적한 환경 같은 전통적인 이유 외에 요즘 북한 핵 위기와 새 정부 출범 등 정치.사회적 이유도 중산층 이상의 '탈(脫) 한국' 바람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따라 취업.연고 이민 대신 투자이민이 늘고 있다.

K이민대행사의 경우 몇년 전까지만 해도 투자이민 대 비(非) 투자이민의 비율이 4대6이었으나 최근 몇달새 6대4로 역전됐다. H법인의 한 이민 전문 변호사는 "미국에 최소 1백만달러(약 12억원)를 투자해야 하는 비자(EB-5)를 신청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미국 등 기존 선진국 위주의 이민에서 벗어나 피지.에콰도르.몰타 등 휴양지가 새로운 이민지로 부상하고 있다. 올 초부터 이민 알선업체들은 관련 상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 "도피 이민은 곤란"=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막연한 사회불안 등을 이유로 부유층이 한다리 걸치기식 이민을 모색하는 현상은 자칫하면 '남미화(상류 계급의 집단 해외 도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사회통합 차원에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김인철 교수는 "글로벌 시대를 맞아 앞으로 '양다리 걸치기식' 이민이 늘 수밖에 없다.

다만 본국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도피용으로만 이민을 이용한다면 계층간 불만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윤창희.이철재 기자thepl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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