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식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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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76년도 대학입시에서 서울대 미대 회화과는 7.2대1의 경쟁률을 보여 서울대학과별 최고경쟁률을 기록했다. 77년도에는 다소 떨어져 6.6대1이었으나 「랭킹」2위. 서울대뿐만 아니라 근년에 이르러 각 대학 회화과는 가장 인기 있는 학과가운데 하나로 부각되었다.
50년대에 이중섭이 대표적으로 겪었던 화가의 「어둡고 괴로웠던 시대」는 지나가고 「화려하고 찬란한 황금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이 같은 고가황금시대는 어린이들의 사회에서 더욱 절실하게 나타난다.

<인기 높은 대학회화과>
국민학교 취학아동이나 국민학교 저학년 아동을 대상으로 한 학원규모의 미술 교습소가 서울에 만약 1백50군데. 개인적인「그룹」지도까지 포함하면 그림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어린이들은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이다.
서울 불광동에서 20여명의 어린이들에게 미술지도를 하고 있는 청년화가 윤 모씨의 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모들은 미술학원을 그저 어린이들에게 취미나 정서를 키워주는 곳쯤으로 생각했지만 요즘엔 대부분의 자모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고가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하고 있어요.』화가황금시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이 말은 경제적인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그릴 종이가 없어 담배 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야했던 이중섭의 시대, 그 시대와 한 폭의 그림이 1천만원(국회의사당의 장우성 화『천지도』)에 거래된 오늘날의 시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다. 「누가재벌」이란 말이 결코 생소하지 않게 되었으며 3호짜리 그림에 고가스스로가 80만원의 정가(?)를 매겨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문예진흥원통계에 따르면 76년 한해동안 전국에서 열린 각종 전시회는 무려 7백여 회. 이중 회화전시회만 약4백 회에 달한다. 「그룹」전이 다수 포함돼 있음을 감안하면 최소한 연 1천명 이상의 화가들이 전시회를 가졌으며 전시된 작품은 한 전시회에 평균 20점으로 치면 줄잡아 1만점에 가깝다.

<한해 만회점이 시장에>
그래도 전시장이 모자라 지방의 중소도시엘 가면 다방 전시, 심지어는 술집전시까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요즘에는 중산층 이상이면 어느 가정엘 가나 그림 몇 장씩은 걸어놓고 있다. 화랑 가의 얘기에 따르면 전문적인 수집가가 아니면서 취미 혹은 투자로 전시회장을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 모으는 사람들이 서울에만 6백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안목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림을 가지려는 사람이 작품에 대한 평가안목을 갖추지 못하는 한 화가가 그 자신의 작품에 값을 매기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중견화가 P씨가 호화「맨션·아파트」에 사는 친지 댁에 초대받아 갔을 때 그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벽면을 모두 그림으로 채우고도 모자라 부엌의 벽에까지 그림이 걸려있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자신의 20호짜리 추상화가 거꾸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중견화가 K씨의 얘기. 「어느 사장 댁엘 갔더니 5호 내외의 소품들이 여러 점 걸려있는데 그림마다 그 밑에 그림보다 큰 동판을 걸어놓고 있었어요. 동판에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새겨 넣었더군요. K씨·P씨·Y씨 등 모두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었다는 것인데 그 집주인의 속이 들여다뵈더라는 것.
이런 수집가일수록 작품의 질은 개의치 않고 비싼 그림만 찾는다. 전시장에서 그림부터 보지 않고 『가장 비싼 그림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 고객이 심심지 않게 있다는 화랑주인 P씨의 얘기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화가들에게는 신나는 현상이다.
주로 10호 이내의 소품만 그리는 중진화가 장 모씨는 3호짜리 그림을 60만∼80만원에, 6호짜리 그림을 1백50만원에 내놓았는데 그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 그림들은 순식간에 다 팔려버린 것이다.

<천만원이나 번 귀국 전>
외국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에게는 귀국전시회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다. 작품이 잘됐든 잘못됐든 이름하나만 가지고 한번 전시회에 보통 1천만원이 거뜬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L씨·K씨·H씨·M씨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러나 이들의 귀국 전 출품작은 크게 평가할 만한 작품이 별로 없었다는 게 미술평론가 L씨의 귀띔.
그런가 하면 한동안 일본의 화상들이 한국 화가들의 작품에 눈독을 들이자(일본에 비하면 그래도 값이 싸니까)몇몇 화가들은 화풍까지 바꾸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이 가운데 사진 같은 사실화, 고급춘화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누드」화가 상당수 포함됐음은 화가황금시대의 부정적인 한 단면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술작품에 대한 과세문제가 검토됐을 때 화가들은 물론 일반여론까지 부당하다는 견해를 보였었다. 그러나 부당하다는 이유는 순수한 학술활동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 오늘날과 같은 현상의 화가황금시대를 더 높이 구가케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정규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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