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대담 조해일 윤병노<정리=정규웅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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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윤=우리의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정신적 갈등과 그 의식구조의 괴리를 냉엄하게 형상화한 몇몇 작품들을 대하고 오늘의 상황을 재음미하게 되었어요. 우선 이병주 씨의 『정학준』(한국문학)을 검토해 볼까요, 이 작품은 아들과 원수의 딸이 결합되는 기구한 숙명을 겪지 않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택한 「정학준」의 이야기를 그리고있지요.
일정 때 고등계 주임으로 모진 고문을 가했던「박팔도」, 지금은 당당한 권력과 재력을 한 손에 움켜쥔 「박팔도」, 그의 딸과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하자 『내가 죽은 후에 결혼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정학준」의 의식구조가 선명하게 부각돼 있어요.
조=작가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겠지요. 저는 서정인 씨의 『병든 집』(뿌리깊은 나무) 에서 바람직한 현실인식의 태도를 발견했습니다.
이 작품은 최근 그의 한국사람들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집요한 관심의 제작 중 하나로서 얼마동안 비평가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리얼리즘」논쟁에 대한 그 나름의 대답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와 같은 시대에, 같은 땅에 산다는 독자로서의 행복감마저 느꼈습니다.
윤=작가가 가져야 할 현실의식·역사의식이 작품 속에 어떻게 투영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겠지요. 박기원 씨의 『부자』(현대문학)는 역사의식을 비극의 방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요.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인 남자주인공과 아버지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여자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다가 그 사실을 알게된 여자주인공이 자살한다는 줄거리지요.「멜러드라머」같은 느낌을 주는 흠은 있지만 전대가 남긴 「이데올로기」의 비극이 오늘의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의 한 단면이 잘 나타나고 있어요.
조=이 달의 뛰어난 작품으로는 이동하 씨의 『모래』(한국문학) 와 오정희 씨의 『불의 강』(문학사상)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래』는 많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한사람의 결정이 그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찰이며 『불의 강』은 노동의 틀에 갇혀 절망한 한 남자를 남편으로 가진 여자의 꼼꼼하고 감각적인 기록입니다. 특히 『불의 강』은 세련된 문체와 감각적인 묘사언어가 빚어내는 회화적분위기가 균형을 이루어 매우 특이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어요.
윤= 『모래』도 전체적으로 구성이 잘 짜여져 있고 기법도 특이하여 소설의 재미란 어떤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양문길 씨의 『이 세상 어딘가에』(한국문학)도 주의 깊게 읽었는데요. 종교적 인생관으로 현실의 삶을 무한 시간개념 속에서 파악하려한 작품으로 주제설명이 다소 모호하게 그려진 흠은 있으나 조직사회 속의 동화과정이 매우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조=한마디로 상황의 우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진우씨의 『독침』(현대문학)도 소설의 재미를 십분 안겨주면서 독자의 도덕적 반성을 촉구한 주목할만한 작품이었습니다.
윤=그 작품과 비교할만한 작품으로 한승원씨의 『쥐신 이야기』(월간중앙)가 있지요.
현대적 신화라고나 할까요. 괴이한 환자의 병력이 소개됨으로써 현대인의 불치병과 그에 따른 환상세계가 신기한 화제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그 환자는 팔뚝하고 혓바닥하고 들쥐 신이 갈라버렸다고 주장한다는 말일세.』이 같은 주치의의 이야기는 현대의 불치병이 정신세계에까지 침투하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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