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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사과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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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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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내가 세월호 침몰 현장인 진도 팽목항에서 목격한 건 신뢰의 위기, 더 정확하게는 민주주의의 위기였다. 실종자 가족들이 모인 실내체육관엔 2014년의 한국 사회가 응축돼 있었다.

 정부 대책본부는 시종 무능함과 무기력함 속에 겉돌았다. 기계적인 브리핑이 반복되자 가족들은 “언제까지 (수색) 상황이 안 좋다는 얘기만 할 거냐” “다 전시행정 아니냐”고 울분을 토했다. 많은 공무원은 상부 보고에 더 신경을 쓰는 느낌이었다.

 사실 안전행정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이 치킨이나 컵라면을 먹은 것 자체가 그렇게 비판받을 일은 아닌지 모른다. 문제는 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에 공감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있었다. “장관님 오십니다”라는 수행원의 안내 멘트와 “기념촬영하자”는 안행부 국장의 말도 단순한 실언이 아니었다. 그 속엔 ‘관(官)은 국민 위에 있다’는 비민주적 마인드가 담겨 있다.

 지난 20일 새벽 실종자 가족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겠다”며 실내체육관을 나섰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경찰이 버스를 막자 가족들은 진도대교 앞까지 10여㎞를 걸어갔다. 대통령을 만나지 않으면 자식들을 구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경찰은 6개 중대를 배치해 진도대교 진입을 차단했다. 무슨 권한으로 그들의 서울행(行)을 막은 것인가.

 진도에 있던 관료들의 안중에 국민이 없었던 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대통령 한 사람만 바라보는 정부 전체의 분위기가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머릿속 매뉴얼대로 움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사고 발생 13일 만에 나온 대통령 사과의 한계는 분명했다. 박 대통령은 어제 “사전에 사고를 예방하지 못하고 초동 대응과 수습이 미흡했던 데 대해 뭐라 사죄를 드려야 할지…”라고 말했다. 이어 국가안전처 신설과 ‘관피아(관료 마피아)’ 추방을 다짐했다.

 하지만 정홍원 총리의 ‘대리 사과’와 사의 표명이 반발에 부닥친 뒤끝이었다. 사과의 공간도 실종자 가족이나 국민 앞이 아니었다. 국무위원들 앞이었다. 사과문에서도 자기반성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쌓여온 잘못된 적폐들을 바로잡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상화하는 노력을 더 강화했어야 하는데….” 사태의 원인을 현 정부가 아닌 과거 정부에서 찾고 있었다. 공무원들을 질타했던 21일 수석비서관회의 발언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사죄” “죄송” 같은 문구들이 들어간 것이다. 국무위원들은 어제도 어김없이 대통령 말씀을 받아 적고 있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번 사과에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사과는 반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왜 분노하는지 상대방 말을 듣는 데서 시작돼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해야 한다. 반드시 상대방 눈을 보면서 해야 하고, 때를 놓쳐서도 안 된다. 그래야 사과하는 사람도, 사과 받는 사람도 마음을 열고 변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대통령의 사과가 울림을 주려면 국정의 중심을 국민으로 돌려놓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했다. 보다 통렬한 자성을 통해 “왜 안전이 중요한가”를 공직 사회에 심어야 했다. “무엇을”과 “어떻게”는 현장의 공무원과 전문가들이 선택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현장 상황에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게 안 되면 아무리 거창한 기구를 신설하고, 장관들을 교체하고, 선장을 살인죄로 기소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지금 관료 조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감능력 부재와 경직성이다. 그날 세월호에 갇힌 학생들의 마지막 카카오톡은 “기다리래”였다. 대체 언제까지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지난 1년간 우리는 야당이 사과를 요구하면 대통령이 버티다 사과하는 장면들을 지켜봐 왔다. 이제 대통령 사과는 대단한 통치행위가 돼 가고 있다. 그리고 사과가 나오면 모두들 훌훌 털고 다른 이슈로 옮겨가곤 했다. 그 모습이 재연될까 봐 무섭다.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마저 잊어버리고 말까 봐 무섭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