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7)제53화 사상검사-선우종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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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홍민표의 전향>
여기서 9월 폭동의 모든 책임을 맡고 대한민국 전복의 최선에서 작전지휘를 해온 홍민표의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홍의 전향과 그의 전폭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극도의 혼란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굳게 뿌리박은 공산당의 비밀조직을 파헤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교)재학 중 1936년 2학년 때 독서회를 조직하였고 다음해에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 무렵엔 일제 경찰 탄압으로 조선 공산당의 조직이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다.
1931년에서 1932년 사이에 박헌영·김현선 등이 관련된「커뮤니스트 사건」이 있었고 이들은 경찰에 잡혀 조직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조선 공산당은 이재유를 중심으로 해서 재건운동을 진행시키고 있다가 1937년 이마저 체포되어 재건조직 공작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1939년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여 이른바「경성 콤·그룹」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출옥한 박헌영을 지도자로 하고 지하공작을 하였는데 1941년 12월까지는 대부분의 당원이 일경에 피검되어 적극적인 지하공작은 끊어지고 말았다 .홍민표는 1940년12월까지 활동하다가 1941년1월10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1943년10월 형기 만료로 출옥, 1945년8월9일 종로경찰서에 예비 검속되었다가 8·25해방으로 석방되었다.
해방을 맞은 그는 곧 조선 공산당 재건 조직에 가담하고「마르크스-레닌」을 연구할 목적으로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 재학 중에 지방당의 조직사업을 하게된다. 이윽고 1946년 대구·10월 폭동 성공으로 당 간부로 발탁되었다.
1946년 11월에는 서울 용산·마포·서대문구 당의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1947년 8월15일 서대문서에 피검 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2월에 다시 피검되었다. 1948년2월18일 미군정 재판에서 1년 징역에 2년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는데 그 이유는 홍민표의 당 직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2월18일 출옥하는 즉시 다시 피검되었고 3월2일 8·15폭동 사건 총책이 되었다가 3월12일에 출옥. 1948년3월16일 서울 용산구 당 책임자로 5·10 총 선거 방해와 파괴공작을 하다가 용산서에 피검. 1948년5월31일 출옥하여 서울 서대문구 당 부 조직부 지도원이 되었고, 1948년 6월에는 동대문구 당 조직책이 되었다. 1949년3월 서울시 당 조직부로 복귀, 4월에는 서울시 당 부부책. 1949년 6월「9월 폭동」의 계획 전담. 7월 북한 지도부 소환에 불응. 1949년 8월 서울시 당부 책임자 겸 특별 위원회 책임자.
이러한 공산당 핵심분자이던 홍민표는 1949년 9월18일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조직과 9월 폭동 음모의 전모를 털어놓았다. 9월 폭동이 실패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고 남로당은 그의 전향으로 박멸된 것이다.
홍민표의 존재는 대한민국의 공안 경찰과 사찰 경찰에다가 백만 대군을 가세시킨 격이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박혀있던 공산 도배들은 그의 공적으로 완전히 뿌리뽑았고 새로이 움트는 싹마저 뽑아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남노당의 총 지휘자 격인 홍민표가 전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공산당의 주체성 없는 정치노선에 회의를 느끼면서부터 일기 시작하였다.
특히「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고비로 해서 신탁통치가 논란의 쟁점으로「클로스업」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차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홍민표 동지가 전향하는 극적인 순간을 살펴보면서 당시의 감격을 되새겨볼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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