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의 슬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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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월말 울릉도 근해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던 어부 25명이 풍랑을 맞아 모두 물 속에 가라 앉았다.
이밖에도 실종·행방불명 중의 어부가 1백39명이나 된다. 이중 상당수가 울릉도 사람들이라고 한다.
울릉도를 둘러싼 바다는 여름철을 빼고서는 풍랑이 가라앉을 날이 거의 없다. 따라서 가깝고도 먼 곳이 이 섬이다.
포항에서 울릉도까지는 약 2백70km, 우리네 리 수로는 7백 리밖에 안 된다.
그러나 10시간반 이상이나 걸려야 배가 닿는다. 그 배편도 하루에 한번밖에 없다. 그것도 바다가 비교적 잔잔한 여름철에만 그렇다. 또 한번에 3백 명밖에 타지 못한다. 바로 한국의 비경이나 다름없다.
신라 지증왕 13년에 이사부가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고 한다. 이게 역사에 나오는 첫 기록이다. 이 때의 이름은 우산국.
울릉도에는 별명도 많다. 울릉, 우릉, 우릉, 무릉, 무릉도….
울릉도란 이름은 고려 때 생겼다. 이름이 많은 만큼 역사도 기구하다.
본토 사람들이 이 섬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였다. 그러나 이조시대에 이르러 해적 왜구들이 들끓자 세종 때 다시 도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공도정책을 쓰기도 했다. 이 섬에 다시 사람들이 옮겨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였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선원 「다젤레」가 처음으로 이 섬을 발견한 1787년에도 이 섬은 무인도나 다름없었다. 한동안 세계지도에 울릉도가 「다젤레」라고 적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1864년에 이 섬을 다시 발견한 「프랑스」선 「리앙코」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부른 때도 있었다.
일본인은 또 송도라고 불렀다. 이때의 독도는 죽도라고 멋대로 부르기도 했다.
울롱도는 동해 상에 있는 가장 큰 섬이다. 당초에는 강원도에 속해 있던 것이 경상북도에 들어간 것은 융희원년부터의 일이다.
섬의 면적은 72·92 평방km. 별로 작은 섬은 아니지만 섬 전체가 용암의 바위산. 따라서 농사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곳은 못된다.
이 안에서 3만명 정도의 어부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오징어철만 되면 7만 이상으로 섬 인구는 늘어나지만 철이 지나면 다시 어디론가 모두 흩어져 나간다.
그렇다고 아주 가난한 섬만은 아니다. 섬의 중심부에는 상하수도가 들어 있고 TV「안테나」들이 늘어서 있지만, 자동차는 단 한 대도 없으니 공해도 없다.
만약에 풍랑만 없고 따라서 아들·남편·아버지를 잃은 괴로움만 없다면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바람이 자는 날이 없듯이 남자를 잃은 슬픔을 안고 있지 않는 집이 이 섬에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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