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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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공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대자보다.
중공에는 주요일간지가 무려 27개나 있지만 이들은 대자보에 비하면 구문들이다. 또한 그 기능으로 보아 살아있는 「뉴스」보다는 이론과 해설이 위주다. 대자보는 옛 왕조시대의 「방」과 같은 형식의 벽신문이다. 중공의 공식적인 일간신문들과는 달리 이 벽신문은 대중들에게 직접 「어필」한다. 대중매체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표현도 즉정적이고 거칠며 어렵지 않다.
대자보가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후반의 이른바 「백가전명」시대부터였다. 중공은 사회주의혁명을 교육하기 위한 대중토론의 장으로 1956년부터 이 대자보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토론이 지나쳐 이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잦아 1957년부터는 다만 상호비리의 수단으로만 이용했다. 자기 혹은 상호비판을 통한 대중교육을 시도한 것이다.
모택동 자신도 『대자보는 아주 효과적인 신식무기』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대중들의 간접적인 정치참여행위로, 일면 사회 심리적인 효과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교육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보의 본산은 북경대학의 게시판이다. 문화혁명도, 비림비공운동도, 반주자파운동도, 요즘의 강경파제거를 위한 정변 모두 북경대에서 출발했다. 새로운 대자보가 나타나면 각종 일간지들은 그 「스트레이트·뉴스」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뉴스」의 속도로는 대자보를 따를 수 없다.
유명한 대자보로는 66년12월24일 유소기국가주석(당시)의 자기비판이 있다. 청화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에서 유는 『중공의 「흐루시초프」』라는 자기비판을 했었다. 그에 앞서 그해 8월, 천안문광장엔 『유소기와 등소평의 사령부를 때려 부수라』는 대자보가 나붙었었다. 이때 서방은 비로소 이들이 실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에 와서 대자보는 중공의 헌법으로 보장이 되어있다. 『인민대중이 창조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규정한 것이다.
북경에 있는 서방신문의 특파원들이 접하는 취재원도 역시 대자보다. 외무성대변인실 보다는 이쪽에 훨씬 값있고 빠른 기사가 있는 것이다. 대자보는 흔히 몇십개도 넘는 벽을 전부 뒤덮고 있어서 그것을 전부 판독하는 것은 보통고역이 아닐 것 같다.
요즘 세계의 이목을 끌고있는 정변소식 예외는 아니다. 「대자보」발이라야 겨우 진상에 가까운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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