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6)서화백년(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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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애국가와 지성채>
춘초 지성채는 백련 지운영선생의 맏아들이다.
1899년에 서울가회동에서태어났다.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을 지낸 백산 지청천(변명 이 청천)장군은 춘초의 재종형이다.
해방후에 춘초가 백산을 도와 일한 것은 너무나 갈 알려진 얘기다.
춘초는 계산소학교와 오성중학교를 다녔다.
부친인 백련선생에게 한학을익히고 서화를 배웠다.
한때 백련의 발현으로 소림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공부한 일도 있다.
「조선미술전람회」동양화부에 출품, 여러차례(2∼7회) 입선의영광을 얻었다.
공예부(18∼20회)에도 3차례나 입선, 만들고 꾸미는 재주도 보였다.
어느해던가, 윤치호와 지석영이 재동가회방9통13포 백련집을 찾았다.
사랑방에 앉자마자 윤치호는 지난해 「프랑스」에 유학갔다 돌아온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학생들은 다 졸업식장에서 자기네 나라 국가를 부르는데 민규식만이 국가를 부르지못하고 나라 잃은 설움에 잠겼다는 내용이었다.
이일이 어찌 민규식 한사람의 슬픔뿐이냐고 역설했다.
윤치호는 분한 생각에 자신이 애국가를 지어 월남 이상재에게 보였더니 그가 글 잘하는 송촌 지석영에게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송촌을 만났더니『나야 옛날걸 번역이나 하지글짓기는 우리 형님(백련)만 못하니 형님에게로 가자』고 해서 백련을 찾아왔다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이말을 듣고 있던 백봉이 『나는 한문에는 익달하지만 국문에는 숙달하지 못하니 삼국지·수호지·사씨남정기등을 번역한일이 있는 조완구를 오라고 해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제안했다.
백련의 사랑방으로(바로 앞집 가회방11통2호) 조완구를 불러서, 윤치호의 애국가초고를 놓고 윤치호·백련-송촌형제·조완구가 이마를 맞대고 추고에 퇴고를 거듭해 처음으로 우리나라 애국가가사를 만들어 냈다.
윤치호가 득의 만만해서 이만하면 됐다고 쾌재룰 부르자 백련이 아랫방에다 대고 『성채야』하고 아들을 고함쳐 불렀다. 아들을 시켜 휘문·중앙·배재·오성·경신학교의 순회 음악교사었던 김인식 선생을 불러오라고 했다. 김인식의 집도 백련집 맞은편 (가회방11통1호)이어서 쉽게 데려올 수 있었다.
애국가 가사를 읽어본 김인식도 금새 악상이 뗘오르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인식에 의해 곡이 붙여져 이 세상에 없던 애국가가 서울장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김인식이 이 학교 저 학교에 다니면서 애국가를 가르쳤다.
김인식은 급기야 조선총독부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것』이라는 말 외에는 입을 다물었다.
가사도 구두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얼버무리고 혼자 죄를 덮어썼다.
김인식은 결국 1년7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윤치호는 한달에 2번씩 김인식의 집에 들러 생활비를 내놓고 갔다.
김인식은 출옥한 후에 대구로 내려가 버렸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의 곡은 안익태가 붙인 것이지만 지금의 늙은이들이 소년·청년기에 잠깐불렀던 「동해물과 백두산…」은 김인식의 곡이었다.
춘초는 우리 애국가 가사와 곡을 짓는데 충실한 심부름꾼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두는게 좋을 것 같아 한줄 쓴 것이다.
춘초는 어려서부터 나라사랑정신을 배워 청년시절에는 이대창으로 변성명해서 대한독립군에 들어갔다.
여기서 국내 금전조달책이 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일을 했다.
8·15해방을 맞아서는 종형지청천을 도와 대동청년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한때 가회동에 경성칠공소를 열어 동인들을 길렀다. 나전칠기의 인간문화재인 일사 김봉룡은 그때 춘초와 같이 일하던 동인이다.
공주에 내펴가 보여금광을 하다가 돈을 많이 없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춘초의 파란만장한 생활의 한 단면이다.
「조전」시대 작품활동을 하다가 붓을 놓고 독립군으로, 대동청년단으로 종힁무진하던 춘초가 근년에 다시 서필을 잡았다.
올 가을에 80평생에 처음 개인전을 갖는다니 그의 필력을 아는 나도 기대가 크다. 조전2회에 입선작품인 마루에 앉아 바느질하는 여인을 그린『미인침선도』가 다시 보고싶은 것은 내가 그를 아끼는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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