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제구력 찾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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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도상훈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은 야구 경기 중 심판과 투수가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투수가 공을 던져 심판의 의사를 묻고, 심판이 응답하는 과정을 ‘일문일답’에 비유했다. 그는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더 재미있지 않나.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가 등판하면 심판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투수들의 제구력 하락은 볼넷으로 이어진다. 80년대와 90년대 프로야구 투수들은 9이닝당 각각 3.17개와 3.28개의 볼넷을 내줬다. 2014년 4월 14일 현재는 4.29개다. 투구 기술과 변화구가 발전을 거듭했지만 제구력은 30년 전 투수들이 더 정교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도 제구력이 과거에 비해 퇴보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상군 한화 코치는 “투수들의 구속과 제구력은 반비례한다. 요새 투수들은 빠르게 던지려고만 할 뿐, 원하는 곳으로 던질 줄 아는 완성도는 떨어진다”고 했다.

 두산 유희관(28)은 이러한 세태가 만들어낸 역설적인 성공사례다. 구속이 느려도 제구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유희관의 직구는 130㎞ 중반이지만 칼날 같은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제압하며 지난해 10승을 챙겼다. 과거 제구력의 달인들은 어떤 비결을 가졌던 걸까.

 1985년 9월 21일 구덕구장에서 열린 청보-롯데전의 경기시간은 1시간33분이었다. 프로야구 최단시간 경기다. 요즘 경기 시간의 절반 정도다. 이날 롯데 선발 임호균(58)은 고(故) 장명부와 맞서 3-0 완봉승을 거뒀다. 그는 87년 청보 시절 해태를 상대로 73개의 공을 던져 최소투구 완봉승을 한 기록도 있다. 임호균은 “국가대표팀에서 홈플레이트에 공 6개를 일렬로 놓고 맞히기 내기를 하면 3번째, 6번째 등 원하는 대로 맞혔다”고 회상했다.

 임호균은 “제구력이 투수의 생명”이라며 자신감을 강조했다. 83년 프로에 데뷔한 임호균은 신인의 각오를 묻자 “백인천을 2할대 피안타율로 막겠다”고 했다. 백인천은 바로 전해에 4할 타율을 기록한 대선배였다. 임호균은 “마운드 위에서 상대를 존경하면 구위와 제구력이 반은 감소한다”고 했다.

 “모르겠다.” 장호연(54)에게 현역 시절 몇 개의 구종을 던질 수 있었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장호연의 주무기는 슬라이더였다. 하지만 슬라이더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줬다. 이렇게도 잡아보고 저렇게 틀어서 던져보기도 하고, 짧게 던지고, 길게 던지고…. 경기 중에도 수없이 변화를 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름만 슬라이더지 제각각의 변화구였던 셈이다. 그는 “포수가 그 많은 구종을 다 외울 수 없어 줄곧 슬라이더 사인만 냈고, 그저 내가 알아서 던졌다”고 말했다. 심지어 만루 위기에서 새 구종을 시험하다 홈런을 맞은 뒤 화장실에 끌려가 선배에게 혼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마운드 위에서 즉흥적으로 변형시켜 만든 슬라이더를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체에 있었다. 그는 “하체가 견고하면 제구력은 자연스럽게 갖춰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문승훈 심판위원은 송진우(48) 한화 코치가 현역 시절 ‘심판을 속이는 제구력’을 가졌다고 말했다. 문 위원은 “과거 ‘심판들이 송진우의 바깥쪽 공에 너무 후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건 심판들이 송진우를 잘 봐준 게 아니고 그가 심판들을 이용한 것”이라고 했다. 공을 한 개 던질 때마다 정밀하게 바깥쪽으로 벌려 나가며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송 코치는 제구력을 총에 비유했다. 그는 “권총은 총열이 짧아 호신용에 적당하다. 저격총은 총열이 길어 목표물을 정밀하게 조준할 수 있다”며 “제구력도 마찬가지다. 누가 더 릴리스포인트를 최대한 길게 끌고 나와 던질 수 있느냐의 싸움”이라고 했다. ‘시속 1㎞ 빨라지려고 하기보다 1㎝ 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는 게 송 코치의 말이다.

 송진우는 심판을 속였지만, 심판을 도운 투수도 있다. 이상군(52) 한화 코치다. 이상군은 1m76㎝, 65㎏으로 큰 체구가 아니었지만 통산 105승을 거뒀다. 그의 제구력에 관해 내려오는 전설 중 하나가 심판에게 스트라이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87년 가을 마무리 캠프였던 걸로 기억한다. 김광철 당시 심판위원장이 나를 불렀다. 심판들을 교육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하더라.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한 개 차이로 넣었다 뺐다 하면서 공을 던져줬다. 볼 판정을 교육하는 훈련이었다.” 그는 투수들의 구속과 제구력이 반비례하는 이유에 대해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움직임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코치는 “고개가 움직이거나 젖혀지는 건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의 공통점이다. 제구력에 손해를 보는 것은 물론 팔에도 무리가 생긴다. 제구력이 좋은 투수들의 폼은 간결하고 얼굴과 시선이 일정해 던지고 난 뒤에도 끝까지 목표지점을 바라본다”고 말했다.

박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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