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형 위주의 행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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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각종 형사법에 규정된 벌금과 과료 액이 인플레 등 경제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현실화되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66년에 개 정된「벌금 등 임시조치 법」을 다시 고쳐 과료와 벌금 액을 5배정도 올리려는 것은 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벌금과 구류 액의 인상을 마치 행형 제도 전반을 체형위주에서 재산형위주로 바꾸기 위한 것인 양 설명한다면 이는 견강부회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법관이 재산형을 과하려다 가도 그 액수가 죄질에 비해 너무 적어 부득이 신체형을 과하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부분적인 예외에 불과하다. 그러한 예외를 마치 중요한 요인처럼 과장하는 것은 성실치 못한 태도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형 제도의 재산형 위주로의 전환을 결코 바람직하지 않거나 못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형 제도의 신체형으로부터 재산형 위주로의 전환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같은 행형 제도의 전진적인 전환이 결코 말로써만 될 일은 아니란 점이다.
이는 사법의 시대정신과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각종 형사처벌법의 벌금과 구류액수를 높이는 것과 재산형 위주로의 행형 제도 전환은 느낌상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벌금·구류액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재산형 위주로의 행형 제도 개선이 진척된다면 58년에 「벌금 등 임시조치 법」을 제정한 뒤 62년과 66년에 두 차례나 벌금·구류액수를 늘렸으니 벌써 재산형위주 행형 제도가 상당히 진척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행형 제도 현실을 과거에 비해 재산형 위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이러한 물음에 대한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지금의 형벌 제도는 숱한 특별법의 양산으로 체형위주, 그중에서도 중형위주로 변모해 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구 형법을 많이 참작한 우리 형법의 형량은 일본 형법에 비해 별로 높지 않다. 일본 형법에 비해 범죄구성 요건을 세밀하게 규정해 범죄의 흉악성이 적은 단순범죄의 경우에는 형량의 최고한도가 오히려 일본보다 낮은 게 보통이다.
일반법인 형법은 이렇게 비교적 온건하지만, 벌칙이 강화된 특별법이 하도 많아 이러한 형법의 정신은 크게 침식되었다. 국회가 한번 열렸다 하면 대개 수십 개에서 1백여 개에 이르는 법안이 통과되는데 이중 상당수가 처벌규정을 신설하거나 벌칙을 강화하는 것들이다. 그런 반면 처벌규정을 완화하는 것은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입법의 현실이 이런 마당에 재산형위주로의 처벌을 운위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더욱 비현실적이고 소박하게 들릴 정도다.
그러나 오히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값있고 절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형벌이 궁극적으로 교화를 통해 범법자의 사회복귀를 목표로 한 것인 만큼 단기신체형이란 원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또 탈세 등 순수하게 돈을 벌기 위한 범죄는 신체형보다도 재산 적인 손실을 입히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가 있다.
그래서 선진국들의 행형 제도는 이미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재산형 위주로의 전환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잊어선 안될 것은 선진국들의 그러한 행형 제도의 전환이 사법종사자들의 사고의 변화뿐 아니라, 법제도 자체의 개혁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말뿐이 아니라 실제 법과 제도의 개혁으로 이를 뒷받침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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