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연구에 억측 이론 많다|진단학회 「세미나」서 이기문씨 발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글을 창제토록 한 세종대왕의 579돌째 탄신일(15일)을 기념하기 위해 진단학회(회장 이병훈)는 최근 연구의 혼란 상태를 빚고 있는 훈민정음에 대해 종합적인 검토를 시도했다.
성대 회의실에서 열린 「세미나」에는 『조선왕조의 훈민 정책』에 대해 이우성 교수(한국사·성대), 『훈민정음의 이본』을 안병희 교수(국어학·서울대), 『훈민정음 연구의 문제』를 이기문 교수(국어학·서울대)가 각각 발표했다.
최근 훈민정음 연구의 동향과 문젯점을 지적한 이기문 교수는 일부 학자들 사이에 기상천외의 억측이 속출, 훈민정음 본래의 의미를 흐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훈민정음 연구에서 이 같은 경향을 보이는 것은 5개 부분.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 역학과의 관련 문제, 고전자 모방 문제, 가획문제, 자모가 27자라는 설 등의 해석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첫째 창제의 목적과 관련,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의도는 한자에 한글 토를 닮으로써 한자를 대중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심지어 어떤 논문에서는 훈민정음 서문 중 「국지어음」의 국을 중국으로 해석하는 이견까지 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이견들은 제한된 한글 관계 자료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 이 교수의 지적이다.
이 같은 확대 해석의 경향은 한글 자형이 고전자를 모방해 만들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에서도 나타난다. 정린지 서문에서만 보이는 사실을 확대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 한글 자모 중 「시옷」은 한자의 「치」에서 「ㅅ」모양을, 「미음」은 한자의 ㅁ에서 모양을 따른 것이라고 종래의 학설이 옮음을 뒷받침했다.
세째로 문제되는 것은 훈민정음을 지나치게 역학과 관련해 해석하려는 경향. 이 교수는 세종대왕이 주역에 깊은 지식을 가졌음은 사실이지만 훈민정음을 역학의 심오한 철학까지 동원, 훌륭하다고 미화시키는 것은 일방적인 예찬이지 학문으로서는 규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ㄷ」을 「ㅌ」으로 만드는 것 같이 한 획을 더하는 가획의 문제도 억지 주장이 많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이제까지는 「ㄷ」을 「ㅌ」으로 만들 때 「ㄷ」의 가운데에 한 획을 옆으로 그은 것이라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부 학자들은 「ㄷ」을 「ㄷㄷ」으로 했다가 「ㅌ」으로 줄었다는 이견을 내놓고 있다. 이 교수는 「ㄷㄷ」과 같은 창견도 좋지만 근거가 없는 사견이라고 평했다.
이밖에 훈민정음 자모가 27자였다는 학설도 최만리의 한글 창제 반대상소, 세종 실록·최세진의 『훈몽자회』를 과신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훈민정음에 관한 한 가장 정확한 사실을 전해 주는 것은 『훈민정음 서문』과 해례문이라고 밝히고 내용을 비약시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기견·이견이 속출하게 된 원인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한글 창제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 해례본의 발전으로 15세기 국어의 윤곽과 음운 체계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이 해명됐으나 「ㄷㄷ」과 같은 기견이 나올 정도로 여러 가지 설이 겹쳐 있다. 특히 이제까지의 설에 무조건 이견을 제시하거나 기견을 내 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학계 풍토도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학계 풍토를 막기 위해서는 ▲제한된 한글 관계 사료라도 착실한 논증을 거칠 것 ▲일부 기견이 나올 수 있는 자료는 다른 것과 비교해 결정할 것 ▲자료를 유추 해석하지 말고 정면으로 해석할 것 등을 제안했다. <임연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