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손가락 끝을 보고 폐의 상태를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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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많은 폐의 병 가운데는 손가락 모양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병도 있어 재미있다.
폐에 만성화농증이 오래 끌게 되면 환자의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굵어지는 증세가 있다. 영어로는 「클러빙·핑거」, 우리말로는 부상지라고 하는데 손가락 끝이 꼭 북채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폐농양이라든가 폐괴저라고 하는 병은 항생 물질이 없던 해방 전만 해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던 병으로 한번 걸리면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든가 아니면 추한꼴로 고생 고생하다가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병들은 손가락 끝을 보지 않더라도 환자의 입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으나 「마이신」 계통의 많은 항생 물질이 쏟아져 나온 다음부터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환자수가 훨씬 줄어들었다.
항생제 때문에 폐에 염증을 일으키는 화농균이 거의 자취를 감춘 대신 이제는 항생제에 잘 듣지 않는 새로운 균들이 나타나서 화농증의 병원균 노릇을 하게 되어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폐농양은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도 그 자취를 감추지 않고 가끔 나타나는데 냄새가 그리 심하지 않다는 것이 그전과는 다르다. 때문에 냄새만으로 페농양을 진단하기는 어렵지만 부상지의 증세는 여전하다.
이 증세는 폐농양 뿐만 아니라 다른 만성 화농성 염증에도 나타난다. 즉 기관지 확장 등에 만성 폐렴이 합병된다든가 만성 폐결핵에 혼합 감염이 병합된 경우는 대개 틀림없이 부장지의 증세가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증세가 나타났다고 하면 우선 폐농양과 기관지 확장증을 의심하게 된다.
폐의 화농증이 있을 때 왜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이 커지고 붓는가에 대해선 아직 정설은 없고 다만 폐에 만성화농증이 있으면 우리 몸의 말초 혈관에 산소 공급이 잘 안되어 이 무산소증 때문에 손가락 끝 뼈에 증식이 일어나 굵어진다는 막연한 학설이 있을 따름이다.
김기호 (연세대 의대 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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