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분노 떨칠 수 없어 힘들다는 30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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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37세 미혼 여성입니다. 억울한 기억이 계속 떠올라 자꾸 저를 괴롭힙니다. 지난해 초 회사를 관두기 전까지 회사를 진심으로 아끼며 정말 열심히 일 했습니다. 결혼보다 일이 더 소중했을 정도로요. 상사한테 인정받아 최연소 팀장이 됐습니다. 그런데 팀원 실수로 회사에 경제적 손실을 입히는 바람에 직속 관리자로 책임을 지게 됐습니다. 평소 나를 아껴준다고 생각했던 상사가 돌변해 “네 책임”이라며 거칠고 모진 말을 쏟아 붓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들이 머리를 맴돌며 계속 괴롭힙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손까지 떨릴 지경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A 말만으로 사람의 생명을 뺏을 수 있을까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의학 학술지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암’보다 무서운 게 ‘말’임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가 2012년에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암을 통보 받은 사람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첫 일주일간 자살 위험도가 12.6배 증가했고, 심장 문제로 인한 사망 위험도도 5.6배 늘었습니다. 암으로 심장이 멈추는 게 아니라 “당신은 암”이라는 말에 심장이 멈춰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암을 통보받으면 대부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닥쳤지’라는 억울한 감정과 분노가 강하게 일어납니다. 이 억울함과 분노가 암 이상으로 해를 주는 겁니다.

 정신과 의사로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굴곡있는 웨이브(곡선)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심조심해서 문제없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해도 살다 보면 억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건에 직면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사건에 대한 기억과 분노를 다스리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과거 사건에 대한 감정 반응이 현재의 나를 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지금 억울한 상황에 있다면 그 사건에 감정적으로 너무 몰입하지 않는 게 필요합니다. 이것을 ‘적정거리 유지’라 합니다. 예를 들어 나를 영화관의 하얀 스크린으로 만드는 겁니다. 직장 상사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의 분노가 거기에 그냥 비춰지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감정을 관객으로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불쾌한 영화 한 편 본다 치고요. 상대방 반응에 너무 빠져들면 그 사람과 함께 영화를 찍는 것과 똑같습니다. 분노를 과하게 표출하는 사람과 같이 영화를 찍으면 본인이 상처를 심하게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감성 스트레스는 그 순간에 풀어주는 게 좋습니다. ‘긍정마음 집중훈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내쉬기를 두 번 반복하면서 배에 집중해 복식 호흡을 합니다. 깊은 호흡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이나 경탄을 자아냈던 경치를 마음 속으로 그려봅니다. 심장 부근에 긍정적인 느낌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2~3분 지속합니다. 그럼 마음이 좀 풀어집니다. 이후엔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주변 사람과 상의합니다. 너무 단순해 보인다고요. 하지만 분노가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일으키는 걸 차단해 내 몸과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해도 심적 상처가 너무 크면 그게 기억 속에 뿌리 깊이 박혀 내 삶에 계속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오늘 사연도 1년 전 사건이지만 마치 지금 막 일어난 것처럼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죠. 내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를 분노하게 만든 사람을 용서해야 할 텐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용서의 의학적 유익성을 연구한 프레드 러스킨 박사의 ‘용서의 9단계’가 있는데, 한 번 같이 알아 볼까요.

 첫 단계는 분노를 억누르는 대신 분노를 일으킨 사건에 대한 느낌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주변 사람에게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르면 더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괴롭더라도 그 감정을 이해하고 용기 있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용서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용서라는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결심을 주변에서 알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용서에 대한 이해인데요. 용서가 화해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또 그 사람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용서는 그저 내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용서하자는 것이지요. 네 번째는 나를 분노하게 만든 사건에 대한 인식인데요. 현재 나를 힘들게 하는 일차적 원인은 2분 전, 또는 2년 내가 공격당한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내 내면의 상처, 그리고 육체적 불편함입니다. 그 사건과 감정을 분리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살아나면 곧바로 스트레스 이완을 위한 기법을 활용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긍정마음 집중훈련도 한 방법입니다. 사색하며 걷기나 요가 명상도 도움이 됩니다. 문화를 즐기는 것도 좋고요. 자기에게 맞는 삶의 이완 요법을 통해 스트레스를 막는 것이죠.

 여섯 번째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줄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건강과 사랑·우정·사회적 성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이 나를 위해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는 기대는 삶의 고통만 일으킵니다.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일곱 번째는 상처 받은 경험만 끊임 없이 생각하는 대신 긍정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 보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과거 회상이 아닌 긍정적인 현재에 투자하는 겁니다. 여덟 번째는 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상처에 대한 가장 멋진 복수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할수록 분노감은 커져만가고 내 삶을 긍정성은 해쳐 인생을 후퇴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넋두리 대신 용서라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 멋진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토리 말입니다.

 9단계가 너무 복잡하신가요. 그럼 한번 2단계로 줄여볼까요. 분노는 내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하니 그렇게 되기 전에 스트레스를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분노에 쓸 에너지를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투자하는 것이 두번째입니다. 아니. 고작 이런 방법으로 한 맺힌 내 아픈 기억이 정말 사라질 수 있느냐고요. 물론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현재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충분히 조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도망치면 끝도 없이 허약해 지지만 마음 먹고 부딪히면 놀라운 용기를 보이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를 용서하는 최고의 전략은 현재의 가치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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