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의 망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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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영어사전을 보면「헤게모니」라는 영어는 1567년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 어원은 『희랍어에서부터 나온 것』으로 되어있다. 고대 희랍에선 동맹관계를 맺은 한 국가가 다른 나라들을 지배할 때 「헤게모니」라는 말을 썼다. 19세기초에 나온 「조지·그로트」의 희랍사를 보면 『맹주권, 또는「헤게모니」는「아테네」수중에 있었다』는 귀절이 있다.
고대희랍 전성기 「데로스」해상동맹은 「아테네」가 주름잡고 있었다. 「스파르타」가 「헤게모니」를 잡고있던 「페로폰네서스」동맹도 「아테네」에는 눌리고 있었다.
최근에 발간된 『포춘』지에서 「슐레진저 전미국방장관은 소련 「헤게모니」의 망령이 세계곳곳을 위협하고 있다는 글을 써냈다. 「헤게모니」란 본시 2천년 전 희랍 세계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인 만큼 「망령」이라고 할만도 하다.
이렇듯 「헤게모니」란 서양사상에 나오는 고사에 유래하지만, 패권이라면 우리에게도 전혀 생소하지는 않다.
중국의 춘추시대에도 패자 또는 패도란 말이 있었다. 맹자에도 패업파지제후지권이란 말을 기록하고 있다.
주의 힘이 약화되어 북방민족이 위협할 무렵, 몇몇 강력한 제후들이 일어나 다른 제후들로 하여금 주실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한편 외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이들을 패자라 했었다.
제일 먼저 나타난 패자는 제의 환공이었다. 그는 형을 죽이고 주색에 젖어가며 패권을 누렸으나 죽고 난 다음에는 제대로 장사를 치르지도 못할 만큼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 이밖에도 송의 양공, 초의 장왕, 진의 목공이 있고 또 와신상담이란 말을 낳게 한 오·월의 피 어린 패권다툼도 있었으나 모두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렇게 동양사에서는 「패」란 무력에 의하여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쓰였다. 고대 희랍에서의 「헤게모니」가 반드시 무력만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뜻하지 않았던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아테네」가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만약에「슐레진저」가 「헤게모니」라는 말 대신에 「패권」이란 한자를 썼더라면 그 경고가 더 무섭게 들렸을 것이다.
적어도 고대희랍의 「헤게모니」에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겠다는 명분이 있었다. 요새의 패권다툼에는 그런 명분이 없다. 명분을 얻자면 남을 패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 좋은 예가 중공이다. 일본과의 평화조약협상에서 중공은 『당권을 바라지 않고 허용하지도 않는다』는 조항을 고집했다. 암암리에 패권에 반대하는 운동의 패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 소련은 중공과 미국이야말로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역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련은 「앙골라」와 중동과 극동 등 세계도처에 마수를 뻗치고 있다. 군사력에서도 세계최강을 노리고 있다. 실상 그것은 망령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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