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19. 물꼬 튼 남북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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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72년 9월 남북 적십자회담 제1차 본회의에 참석키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범석 대한적십자 수석대표가 북한 소녀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있다.

1953년 휴전 이후 남북이 본격적으로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70년대에 진행된 적십자회담이었다. 이 회담은 박정희 대통령이 71년 8월 남북 이산가족찾기 등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적 긴장완화의 흐름에 우리 나름대로 능동적으로 대처한 정책이었다. 미국 측에서는 자기들의 종용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하려는 눈치였다. 그 어느쪽이든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그 흐름을 자기네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청와대 공보비서실에서는 일찍부터 언론계와 학계 전문가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비공개리에 국제정세의 추이를 분석하는 모임을 갖고 결과를 대통령께 보고해왔다. 인도주의적 문제를 해결키 위한 남북 간 접촉의 필요성 등도 보고서에 포함되었다.

당시는 주한미군의 철수 내지는 감축이 추진되어 한국으로서도 자주국방 능력을 강화하고 국력을 조직화해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극심해지는 북한의 무력도발 등에 양면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남북대화가 필요했다. 정부 내 다른 기관에서도 건의했겠지만 박 대통령은 공보비서실의 보고를 참조하여 적십자회담이 가장 유효한 방책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래서 우리 연구팀에서는 70년대 들어 적십자회담이 시작될 때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심전심으로 이제부터는 국방력 못지 않게 외교력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우리나라에는 유능한 외교관은 더러 있었지만 탁월한 외교가는 없지 않으냐는 탄식을 하곤 했다.

박 대통령은 적십자회담 실무회의가 답보 상태에 있을 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를 것 없어. 최소한 우리를 치려는 상대방의 한쪽 손을 맞대고 있으면 그들이 우리를 치려고 할 때 금세 알아차릴 수 있으니깐 말이야."

이것이 남북대화에 걸고 있는 박 대통령의 또다른 목적이었다. 그러면서 남북 간 신뢰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무슨 합의를 하든 그것은 휴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방침은 전혀 달랐다. 김일성은 72년 8월 북측 대표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적십자회담을 통해서 합법적 외피를 쓰고 남조선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트일 것 같으면 회담을 좀 끌어보고,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남조선에서 당장 받아들일 수 없는 높은 요구 조건을 내걸고 회담을 미련없이 걷어치워야 한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회담장을 우리의 선전무대로 이용해야 한다."

남북대화는 이처럼 시작부터 동상이몽이었다. 우리는 자유롭고 공개된 다원화 사회임을 자랑해왔다. 그러나 겉모양만 그러했고 알맹이는 미숙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전체주의 사회와 대결할 경우 국론 분열의 위험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고 늘 걱정하면서 대비책에 골몰해왔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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