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등산 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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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주형렬과 나는 와사봉정상을 정복한 후 3m적설의 비탈을 「스키」로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1윌11일이었다. 마천령 5연봉을 돌파하는데 당초 계획보다 열흘이나 초과한 18일이나 걸린 것이다.
이날 우리는 빙설의 선오택골짜기를 건너 백두상봉의 허리인 해발1천8백60m 지점에 제5전진 「캠프」를 설치했다.
이곳에도 강풍설이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휘몰아쳤다. 마면혼방의 질긴 2중「윔퍼·텐트」(중량15kg)와 「히말라야· 코로즈」로 된 5인용「포라·텐트」(중량25kg)를 가설, 대강 짐을 정리하고 물만 끓여 먹은 후 불안 속에 비석의 밤을 맞았다.
이날은 「버너」가 3개나 고장, 설상가상 격이었다.
밤바람은 또 폭풍이 되어 천막과 씨름하는 밤샘을 강요했다. 이런 첩첩의 고난중에 한·일 혼성의 우리는 서로 한마음으로 뭉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경에서 더욱 냉정해지고 의지와 신뢰가 굳어진 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다음날인 12일 나는 주형렬·유재선과 함께 영하35도의 새벽 6시부터 시작, 제6 작업을 시작, 제6「캠프」설치 예정지까지 먼저 갔다온 후 전원이「윔퍼·텐트」하나만 가지고 일제히 전진, 정계비가 있던 자리 조금 위인 백두주봉아래 해발2천3백50m의 골짜기에 제6「캠프」를 설치했다.
제5「캠프」에서부터는 눈이 바람으로 「크러스트」(동설)되어 입산이래 처음으로 「스키」를 벗고 「아이젠」과 「피켈」만으로도 빠지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제6「캠프」는「윔퍼·텐트」한 개만 설치했기 때문에 대원7명이 모두 이 속에 기어들어 다리·가슴을 겹친 채 웅크리고 앉아 천막이 터질 듯 법석을 쳤다. 이렇게 하니 오랜만에 춥지 않은 밤을 지낼 수 있었다.
13일 마침내 백두산 동정의 날. 이에 앞서 전날 밤 석부와 나는 속결의 천지행여부로 또 의견이 맞섰다. 나는 백두산등반에서 어찌 천지를 밟아보지 않겠느냐고 우겼고 석부는 아직도 하산생환의 길이 까마득한데 욕심을 내지 말자는 절실한 주장이었다.
이에 반산·양두철 등 모두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뭍의 이견은 그대로 팽팽히 맞선 채 타협이 되지 않았다.
13일 아침은 영하38도. 그렇게도 날씨가 좋아지기를 빌었건만 운무에 눈보라마저 일어 2,3m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당초의 고집을 꺾지 않고 주형렬·반산과 계속 A조가 되어 등정 후에 천지로 내려가 1박하고, 나머지 넷(B조)은 등정 후에 제6「캠프」를 철수하여 수림지대까지 하산, 제7「캠프」를 설치하여 우리를 기다리도록 「스케줄」을 짰다.
나의 이 제안에 석부는 물론 대원 모두가 쾌락했다.
새벽6시 다소 가벼운 차림으로 A·B조가 조금 간격을 두고 출발, 1시 남짓 걸려 흑요석의 단애 망천후가 있는 천지의 화구턱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기대했던 천지의 장관은 무서운 강풍에 소용돌이치는 두터운 운무에 가려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의 몸을 휩싸며 집어삼킬 듯 하는 어두운 운무의 회오리는 마치 악귀의 비명과 같은 귀를 찢는 괴성을 질러댔다.
우리A조는 최종 봉먀등정의 영예는 B조에게 주기로 하고 곧바로 천지로 내려갔다.
하늘아래 들끓는 가마솥에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천지화구벽은 경사50도에 수직고차5백여m의 어마어마한 빙설벽. 반「그리세이딘」(설벽골강법)으로 쾌속하강. 백분쯤 걸려 천지안(해발2,257m에 도착했다. 천지는 완전 동결, 천상의 광활한 온백색 광야-기막힌 자연의 조화였다.
만고의 지열을 뿜던 화구가 불기둥 대신 얼음덩이라니...두터운 빙상은 다시 15∼30cm의 동설로 덮여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야릇한 기분으로 활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벼락같은 굉음이 천지를 진동, 우리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얼음갈라지는 소리였다.
우리는 가장 짧은 횡단「코스」를 택해 40여분만에 활문에 도달, 그 바로 위 무인의 폐사인 종덕사로 올라갔다.
거기엔 목조의 3중법당이 기묘한「스노·홀」(눈굴)을 이루고 있어 외기 영하37도에 아랑곳없이 아늑한 잠자리가 되었다. 백두천지 모신의 품에 안기 듯 우리 셋은 영원한 평화와 희열을 느끼며 날이 저물자마자 따뜻한 잠에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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