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동 학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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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개미들은 집이 바뀌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여왕개미가 새집을 마련하면 개미군은 줄을 이어 이사하여 그날부터 새 살림을 마련한다.
아마 당국은 학교도 이렇게 예사롭게 옮겨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강북에 있는 경기고를 강남으로 옮겨 놓겠다는 것은 당국의 인구 소산책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교사가 옮겨진다 해도 학생들의 거주지는 여전히 강북에 있다. 따라서 학생들의 통학만이 불편해 질뿐이다. 온 가족이 학교를 따라 이사할 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도 인구 소산에 도움이 될 턱은 없다. 추첨 입시의 원칙만으로 따진다면 이른바 명문교의 존재이유도 없어진다. 따라서 경기고가 공동 학군에서 3학군으로 바뀌어진다고 탓할 일이 못된다.
그렇다면 기왕에 있는 교사를 없앨 필요 또한 없어진다. 강북에도 진학 학생들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기에는 75년의 역사가 얽혀 있다. 동창생이 아니라도 서운한 것은 마찬가지다.
한때 「시카고」 대학의 교사를 이전시키려는 계획이 검토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조용하고 깨끗하던 대학 주변이 완전히 흑인들의 「슬럼」으로 변해 해만 떨어지면 학생들이 출입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졸업생과 학생들이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 오랜 역사로 이끼 낀 교사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페르미」가 처음으로 원자탄 실험을 했던 유명한 경기장을 지날 때마다 학생들이 느끼는 자랑을 뭣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시카고」 대학도 옮기지 않았다.
역사처럼 값진 유산은 없다. 물론 75년의 연륜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연륜이 은근히 풍겨 주는 것들은 현대 시설을 완비한 어떠한 시설보다도 값진 것이다.
「하버드」 대학을 찾은 어느 외국인이 뭣이 이 대학을 위대하게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총장은3백년의 역사라고 대답했다 한다.
경기가 명문교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 75년이라는 연륜 때문이다. 그 동안 다른 학교보다 뛰어나게 훌륭한 교사나 학생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사에서 배운다는 긍지와 자랑이 학생들에게 다시없는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교육을 평준화한다 해도 보다 우수한 학생들을 키운다는 교육의 이념마저 달라질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역사를 창조 하자면서 자꾸만 역사가 파괴되어 가고 있다. 광희문이 복원되는 한편으로 유서 깊은 문리대 자리가 호화 주택지로 팔려 나가고, 수만의 웅지에 부푼 학생들이 1세기 가까이나 다져 오던 화동 학사의 터가 팔려 나간다. 역사를 허물기가 그리도 쉬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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