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맡기 싫다" 의원들 파병 몸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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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5일 오후 국회의사당 앞에선 시민단체 회원 등 6백여명이 이라크전 한국군 파병 반대 시위를 벌였다. 주변엔 경찰 3천여명이 깔렸다. 이런 가운데 이날 파병 동의안을 처리할 예정이었던 국회 본회의는 취소됐다.

"국론이 분열됐다" "당론 조율이 안됐다"는 이유에서다. 이날 아침까지만해도 동의안 처리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민주당은 "권고(勸告)적 당론으로 찬성한다"고 결정했다. 한나라당도 "국익을 위해 찬성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 반대 의견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후 의원총회가 반대 쪽 의원들 탓에 길어지자 한나라당도 "본회의를 연기하자"는 방향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이 낸 파병 동의안을 盧대통령 지지 성향의 의원이나 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한나라당이 밀어붙이는 모양새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게 한나라당의 입장이었다. 결국 양당은 오후 4시쯤 수석부총무, 총무 간 연쇄 접촉을 갖고 본회의를 취소했다.

한나라당 이규택(李揆澤)총무는 "盧대통령이 좀 더 국론 결집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이 파병 반대론자들을 설득하란 요구다.

◆"왜 우리가 악역을 맡나"=한나라당 의총에선 찬반이 팽팽했다. 국방위 간사인 박세환(朴世煥)의원이 "파병 동의안을 처리해야 한다"며 당위성을 설명하려 하자 고함이 터졌다.

반대 쪽에선 "대한민국은 머지않아 전범국가가 될 것이다"(金洪信) "한.미 상호방위조약 어디에도 침범 행위에 대한 부담은 지지 않도록 돼 있다"(金富謙)고 했고, 찬성 쪽에선 "북핵 문제 해결엔 한.미 공조가 필수적, 사활적인 문제"(沈在哲)라고 맞섰다.

심규철 의원은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던 盧대통령이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하는 데 대한 설명이 없다"며 "대통령이 국민과 민주당을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규택 총무가 "파병을 당론으로 하되 본회의장에선 자유투표하자"고 정리했지만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다시 의총을 열어 "연기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만 전쟁광으로 몰릴 수 있다"(鄭亨根)는 우려도 나왔다.

◆"자유투표로 정하자"=민주당 의총에선 당론이 뒤집혔다. 오전 최고위원회의.당무회의에선 찬성을 당론으로 정하되 반전 여론 등을 감안해 의원 개인 의사를 존중한다는 '권고적 당론'을 결정했다.

그러나 오후 두시간 넘게 계속된 의총에서 "이라크전은 명분없는 침략 전쟁"(金榮煥) "본회의장에서 소신에 따라 결정하자"(薛勳)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결국 민주당은 당론없이 본회의에 참석해 의원 자유 의사에 따라 투표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의원들은 "지도부 결정이 번번이 의원들에 의해 묵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시민단체가 파병 찬성 의원에 대해 낙선 운동을 벌이겠다는 소식이 의원들에게 전해지며 당론이 뒤집히자 당 일각에선 "국익보다 의원 개인의 이익을 고려한 처신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날 의총에서 김근태 의원 등은 "국민 다수가 전쟁에 반대해 그냥 통과시키면 국론 분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장성원(張誠源)의원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의 힘을 빌리려면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병 찬성 발언은 張의원뿐이었다.

한편 김경재(金景梓) 의원 등 여야 의원 30여명은 공병대를 제외하고 의무병만 파병토록 하는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신용호.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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