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교수 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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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삼국사기' 러시아어 완역은 러시아 한국학, 나아가 서양 한국학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한국학의 위상을 달리 만들 게 분명하다.

첫째, '세계사', 그리고 '동아시아 역사'의 판도에서 이제부터 한국이 확연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일본서기'(日本書記.720년)가 거의 1백년 전에 영역(英譯)됐고, 중국의 주요 사서들이 초역(抄譯)되며 철저하게 연구되는 데 반해 '삼국사기'가 번역되지 않아 삼국.통일신라 시대의 한국사가 중국사와 일본사의 일부분으로 다루어져 왔다.

이 결과 삼국의 문화가 '중국 문명의 동점(東漸)'의 입장에서 서술되며 통일신라가 '중국적 모형을 가장 완벽하게 따랐던 사회'로 묘사되는 것은 물론 '일본서기'의 일본 중심적 사관에 기반한 일제시대의 '임나일본부'설도 늘 하나의 '근거 있는 가설'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7세기 신라의 자주적 외교술을 반영하는 강수(强首)의 편지들이 실린 '삼국사기'의 전문이 이제 서양어로 나왔기에 "중국 모형을 따랐다"는 수준의 이야기들이 더 이상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신라 본기'와 '열전'에서 왜구들을 많이 언급해도 '임나일본부'를 언급한 적이 없는 '삼국사기'가 번역됐기에 '일본서기'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서양의 한.일 초기 관계 연구자들의 동향도 바뀌리라 믿는다.

둘째, 서양인의 한국 고대사 서술이 보다 많은 구체성을 띠게 될 것이다. 기본 원자료에의 접근이 쉬워진 완역 이후의 상황에서는, 학문적 훈련이 아직 덜 된 서양의 대학원생이라 해도 개설서에 의지해 추상적인 이야기를 쓰는 종전의 수준에서 벗어나 구체적 지명.인물.사건 중심의 가치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 고전의 서양어 번역 작업에 엄청난 자극이 주어졌다. 러시아어판이 있기에 '삼국사기'의 영어판 번역도 쉬워졌고, '삼국유사'의 서양어 번역(대중적인 영문 번역이 나와 있지만, 학술적 번역은 아직 없다)도 보다 용이하게 됐다. 나아가서는 사서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의 번역도 촉진될 것이다.

오늘날의 서양 지식인들이 서양 언어로 번역된 일본의 시가집인 '만엽집'(萬葉集.8세기 중반)이나 당나라의 왕유.이백 등의 시만을 탐독하게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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