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비용 1750조원의 오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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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을 화두로 던졌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사회분열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한반도 통일시대의 기반을 구축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저변엔 통일 무관심 현상이 흐르고 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례 통일의식 조사는 이를 보여준다.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2007년 63.8%에서 지난해 54.8%로 감소했다. ‘통일이 남한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은 2012년 51.6%에서 지난해 48.9%로 떨어져 처음으로 절반 밑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청소년·대학생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가난한 북한주민을 우리가 먹여 살리는 통일은 꺼려진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통일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심리는 독일 통일(1990년)의 교훈이 잘못 인식되는 과정에서 생긴 측면이 크다. 동·서독 통일 직후부터 후유증이 부각되면서 통일에 대한 동경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동·서독 통일 이후 15년간 1조4000억 유로(15년 평균환율로 1750조원)가 통일비용으로 투입됐다. 연금과 실업수당 등 소모성 지출로 재정적자와 성장둔화가 닥쳤다. 이 때문에 통독에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이 씌워지기도 했다.

 이런 현실은 우리 국민들에게 통일은 민족번영을 약속하는 키워드가 아닌 성장과 복지를 단숨에 삼켜버릴 괴물로 다가왔다. 정부 당국도 통독 문제점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97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펴낸 『독일 통일모델과 통독 후유증』이란 책자는 “ 민족 내부 간 갈등은 오히려 증폭된 것이 독일 통일의 현주소”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과 판단은 단견임이 드러나고 있다. 독일은 2003년 경제회생을 위한 ‘어젠다 2010’이란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2006년 통일 후유증에서 벗어났다. 이젠 ‘유럽의 엔진이자 지갑’이란 찬사를 받으며 위기 속 유럽연합(EU) 경제의 버팀목이 됐다. 그 중심에 선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동독 출신이다.

 통일비용에 대한 부담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1조4000억 유로는 국내총생산(GDP)의 4~5%, 연방예산의 25~30%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하지만 통일비용 부담 때문에 고통받았다고 말하는 독일인은 찾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19일 “통일비용의 70% 정도를 재정차입으로 해결했고, 통일 관련 직접세 등 가계가 부담한 통일비용은 총 소득의 2%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통일을 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만 분단으로 인한 부담이 사라져 실제로는 통일로 인한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도 “통일에 드는 돈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봐야 한다” 고 주장했다.

 독일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가 크게 바뀌었는데도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독일 통일=후유증’이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전문가들은 후유증만 부풀려진 잘못된 ‘통일독일 따라 배우기’에서 이젠 벗어날 때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25일 베를린을 방문하는 박 대통령은 요아임 빌헬름 가우크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를 만나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양국 간 협력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통일 대박’을 제시한 박 대통령에겐 독일 통일의 교훈을 듣는 현장학습이란 의미도 크다. 이영기 독일 함부르크대 교수는 “분단 시절 ‘브란덴부르크의 문이 닫혀 있는 한 통일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고 한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집념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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