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쇼크후의 두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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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륙반공」과 「대만해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얼음장같은 대치가 계속되기 26년째. 그동안 거인의 잠재력은 현실적인 실력으로 성숙되었고 「다윗」의 지혜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측이 거둔 성공을 가리켜 『한족의 승리』라고도 말한다. 일본 「프레지던트」지는 그 가운데 최근의 경제적 성공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편집자주>

<물가안정에 성공한 자유중국>기민한 물가대책으로 안정 찾아|인상요인 일시에 올려 절약효과 거둬|재정·통화 공급 절제로 가공수요 억제
자유중국은 개발도상국 가운데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파동을 가장 기민하게 처리한 나라의 하나다.
자유중국정부의 물가안정정책은 두개의 바퀴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그 첫 번째는 대담한 시장가격존중정책이다. 따라서 「오일·쇼크」후 원유와 각종원자재가격이 급락했을 때 정부는 물가인상요인이 발생하는 대로 가격인상을 단행했다.
예컨대 휘발유 85%, 「디젤」유 50%, 「벙커」C유 94%, 전력요금 80%, 「버스」요금 67%의 가격인상을 일거에 해치웠다. 식료품이나 공공요금도 예외 없이 모든 인상요인을 가격에 반영시켰다.
그 결과는 물론 물가의 충격적 폭등이었다. 하지만 모든 인상요인이 일시에 해소되었으므로 그 이후에는 가격안정이 저절로 실현되었다.
이와 같은 고가격안정책을 실시한 결과 「인플레」의 악순환이 정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절약도 이뤄졌다.
말하자면 입으로 물자아껴쓰기 운동을 펴는 대신 아껴 쓸 수밖에 없는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자발적인 절약운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물가안정책의 또 하나의 바퀴는 균형재정과 통화공급의 절제에 의한 가공적 수요촉발억제이다.
다시 말해서 고가격안정책으로 국민의 「인플레」심리를 진정한 후 정부가 수요「인플레」의 요인인 통화남발을 삼간다는 얘기다. 사실 인상요인의 가격반영 이후에 재정·금융「사이드」에서 통학공급을 늘린다면 새로운 인상요인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중국정부는 남북고속도로건설 등 10대 건설사업에 경제정책의 운명을 걸다시피하면서도 재정적자나 중앙은행차입은 극도로 줄이고 있다. 그리고 만부득이한 경우에는 세수에 의한 상환까지의 기간을 단기화 함으로써 그 주름살이 물가쪽으로 가는 것을 막아 놓았다.
어쨌든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 전세계적인 광란물가시대 속에서도 섬나라는 비교적 평온스럽다.
도매물가상승율은 73년 22·9%, 74년 40·7%가 뛰었으나 올 2∼6월에는 연율 6%이하로 연착륙했으며 올해에는 10% 이하의 안정이 확실시된다.

<대외무역 확대해 가는 중공>「자력갱생」서서히 탈바꿈|수출입의존도 8∼10% 늘어나|52년 이후의 소련 예로 보아 불가피
공룡이 지상에서 절멸된 것은 기후변화에 자신을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거수는 결국 자신의 덩치 때문에 죽고 만다.
하지만 중공의 경우 이와 같은 비유는 먹혀 들어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국제기업에 대한 그들의 기민한 대응자세가 이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주은래는 지난 6l년 국제분업의 이익이 적어도 중공에 관한 한 필요 없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지대물박」한 중국대륙은 국내시장 자체가 구주전체를 합한 정도의 자원과 잠재적 시장을 갖고있기 때문에 국내분업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자력갱생원칙은 문화혁명이 마무리되고 미·중공 화해가 이뤄지면서부터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GNP의 수출입의존도가 건국이래 줄곧 4%선에서 맴돌던 것이 지금은 8∼10%로 늘어난 것이다.
예컨대 중공의 수출입액은 73년 98억7천만「달러」로 전년비 36%대, 74년에는 1억37억6천5백만「달러」로 전년비 39·5%의 대폭적인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변화는 증가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발견된다. 무역적자가 73년 1억2천만「달러」, 74년에는 그 10배인 12억7천만「달러」로 늘어난 것이다.
중공은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빚 없는 나라」임을 자랑해왔다. 58∼60년의 이른바 재해 3년 때에도 일부 지방에 아사자가 생기는 것을 무릅쓰고 수곡의 수입을 절제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무역의 대폭적인 신장과 무역적자의 발생은 중공의 경제정책에 어떤 중대한 변화가 생겼음을 반증한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오일·쇼크」 때문에 강요된 것일 뿐 중공의 체질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소련이 전반적인 공업화와 전화복구를 끝낸 52년 이후 급격히 국제분업옹호론자로 변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시사를 준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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