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탈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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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탈리아」의 「엘리어트」로 알려지고 있는 「에우제니오·몬탈레」에게 75년도 「노벨」문학상이 돌아갔다.
현대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시인이라면 누구나 「T·S·엘리어트」와 「에즈러·파운드」를 든다.
우리 나라에는 「파운드」의 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번역도 된 적이 없지만 「엘리어트」의 시만은 제법 많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현대시단에는 이들만이 있던 것은 아니다. 독일에는 「브레히트」가 있었고, 「프랑스」에는 「폴·엘뤼아르」·「아라공」 등이 있고, 영국에는 또 「킹슬리·에이미스」가 있다. 멀리 「칠레」에는 「네루다」가 있었고 미국에는 또 「E·E·커밍즈」가 있다. 「아프리카」에도 「소이니아」라는 훌륭한 시인이 있다.
이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적다. 「몬탈레」의 시도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소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태양이 내리쬐고 모기가 구름 떼처럼 무리지는 저 토지에 그날처럼 오늘도 또 네 앞에 서보니 나는 화석처럼 굳어버린다…』
이런 시 한 구절만으로는 왜 그가 「노벨」상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 길이 없다.
문학사전에 보면 그는 『황폐한 현대세계의 내적 풍경을 여기에 어울리는 복잡하고 새로운 기법으로 훌륭하게 정착시켰다』고 되어있다.
그는 「엘리어트」나 「마운트」의 시 세계와 같은 곳에서 살았고 또 똑같은 것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다만 「엘리어트」의 주지성에 비겨 그에게는 자못 주정적인 요소도 섞여있다는 차이를 엿볼 수 있는 것 갈다.
그리고 이런데 「이탈리아」시의 흐름의 주조가 나타나있다고 할까. 「이탈리아」의 따뜻한 태양, 지중해의 화려한 풍토는 아무래도 「뉴잉글랜드」의 회색이 짙은 풍경과는 다른 영향을 시인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런데서 서구의 「이미지즘」과는 다른 독특한 「에르메티즘」을 낳게 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그는 젊었을 때는 성악가를 지망하고 음악을 공부하였었다고 한다. 따라서 청각이 유난히 민감했던 그가 지적 「퓨리즘」보다도 음의 「퓨리즘」을 더 즐겨쓰게 된 것도 짐작할만하다.
이것은 자칫하면 감미로운 「에로티시즘」이나 「데카당스」에 빠지기 쉬운 일이다. 그가 그렇지 않았던 것은 「이탈리아」서북부의 황량한 풍토 속에서 오랫동안 고독 속에 잠겨있었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지방성과 세계성이 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그에게 「노벨」상이 돌아간 것은 아무래도 「스웨덴」한림원의 지극히 민감한 중립주의 탓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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