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과 제3세계와 한국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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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엔」운영위에서의 한국문제 의제채택 과정을 보면 30차 총회의 한국문제 토의가 얼마나 파란을 일으킬 것인지 짐작이 간다. 운영위에선 우리측 결의안이 9대8의 한표 차로 의제로는 채택됐으나 서방측 결의안을 의제의 선항목으로 하자는 안은 부결됐다. 반면 공산측 결의안은 16대0으로 의제에 올랐다.
의제채택에 있어 서방·공산 양 결의안의 엄청난 표 차는 양측의 전통적 투표 행태를 감안하더라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전통적으로 서방측은 「유엔」의 보편성 원칙에 따라 제안된 모든 안건을 다루자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공산측은 그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은 봉쇄하려는 태도를 견지해놨다. 이러한 투표 행태의 차이는 「유엔」초창기 다수파와 소수파란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판도가 변화한 지금까지도 타성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제3세계 국가가 「유엔」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면서부터 「유엔」의 질서는 변모했다. 그 결과는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 강대국의 횡포가 견제되고 선진국에 대한 개발도상국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선진공업국 위주의 세계경제 질서의 개편도 모색되고 있다.
그렇지만 「유엔」의 제1의적 임무인 세계평화 유지기능은 무력해지고 말았다. 집단 안전보장을 통한 세계평화의 유기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기능은 이미「유엔」의 손을 떠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간 분쟁의 해결은 분쟁 당사국과 강대국의 막후협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실정이다.
최근 「인도차이나」의 전란이나 중동사태 해결에 있어 「유엔」은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기껏 관여해 보았자 보조역할에 불과했다. 이렇게 변질된「유엔」이 우리의 통일·안보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리란 것은 분명하다. 54년부터 70년까지 17차례나 통한결의안이 「유엔」총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조국의 통일은커녕 초보적 진전조차 이루지 못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설혹 공산 측의 「유엔」군사 해체·외국군 철수 결의안 등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유엔」사나 주한 미군의 지위가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은 「유엔」이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했고, 북괴 남침시「유엔」군의 깃발을 제공한 역사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기구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국민도 「유엔」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다만 북괴가 계속 한국문제를 「유엔」에 제기하는 한 이를 그냥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다는데 우리 외교의 고민이 있다. 더구나 평화유지 기능은 무력해졌을 망정 「유엔」의 국제여론환기 기능까지 무시할 순 없다.
따라서 「유엔」총회에서의 승패가 우리의 운명이나 좌우하는 것처럼 국민들이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우리 외교가 「유엔」을 도외시해도 좋으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더욱 외교 당국으로 말한다면 싸움을 시작한 이상 승리를 쟁취할 책임이 있다. 이긴 뒤에라야 장기적 정책변경도 떳떳한 것이지, 그렇지 못한 정책전환이라면 자기합리화를 위한 판명으로 밖에는 인정되지 못하는 법이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불모지대였던 비동맹회의에서의 패배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여태껏 우리가 누려온 「유엔」에서의 우세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변명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절차 문제 결정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30차 총회의 실질적인 한국문제 토의와 표결은 이제부터다. 서전에서의 어려움을 거울삼아 최후의 승리를 향해 외교 당국의 가일층의 책임감과 분발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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