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8)|전국학연<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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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보급품 훔쳐내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차차 영내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가끔 부대 밖에도 나가게 됐다.
부대 옆의 기병대나, 그 주변의 대판육군병원이외에 과히 넓지 않은 들에는 민가가 띄엄띄엄 산재해 있었다.
부대만 없다면 아늑한 전원이랄 수 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다 나는 우연히 우리말 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우리 동포였다. 이름은「가네다」(금전), 바로 우리 연병장 가까이 산다고 했다. 정말 반가왔다.
그를 통해 근처에 우리 교포들이 몇 집 산다는 것도 알게 됐다. 대체로 그들은 노동이나「야미」(암)쌀 장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수공업으로 나무 단추를 만들어 파는데 먹고 살기가 괜찮다고 했다.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하며 헤어졌다. 그후 외출할 기회를 만들어 그의 집을 찾아가 보
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보급품 수송 중에도 틈틈이 그 집을 드나들게 됐다.
나뿐 아니라 조진대(진주출신) 박종준 (남원출신) 「시미즈」(청수)라는 이름의 김군 등도 수시로 출입했다.
우리에게 그 집은 제2의 고향집이었다. 김치를 먹고 방송정보를 듣는 이외에 밀주인 막걸리를 마실 수 있어 좋았다.
문약한 조진대군은 막걸리를 들이켜고 나는 이난영의『목포의 눈믈』,이에리수의『황성옛터』,『나그네 설움』을 유성기에 틀고는 따라 부르는 것이 일수였다. 그러나 마냥 신세를 질 수만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보답의 길을 찾아 보았으나 1등병 신세에 속수무책이었다. 궁리한 결과 보급품을 훔쳐내기로 했다.
우리 부대에는 병참창고가 여러 개 있다. 그 속에는 말먹이와 식량을 비롯해 일본은 물론 저 멀리 남방이나 만주까지 실어 가는 보급물자가 가득했다.
우리는 계획을 짰다. 열쇠담당·창고담당·운반담당 등으로 우선 일을 분담했다.
각 창고의 열쇠는 위병소에 걸어 놓고 보초를 교대할 때마다 정확히 인수인계 했다.
그 열쇠가 바로 보은의 열쇠였다.
거사 일은 우리중의 한사람이 위병소의 보초를 설 때다.
위병소의 보초는 변소에 가는체하고 지정된 창고의 열쇠를 지정된 나무 밑에 슬쩍 떨어 뜨려 놓는다.
그러면 다른 한 사람이 바로 그 열쇠를 주워 다가 창고 문을 따고 다시 그 자리에 갖다 놓는다. 변소에 간 위병은 돌아오면서 그 열쇠를 주워서 다시 정 위치에 옮겨 놓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미 창고 속에 들어있고 열쇠는 재 위치에 있으므로 위병이 교대 되어도 아무 탈이 없게 된다. 우리는 어느날밤 이런 절차를 밟아 행동을 했다. 창고안에 들어간 우리는 우선 담요를 펼치고 귀한 설탕·통조림·건빵이며 옷가지 등을 마음껏 쌌다. 단단히 짐짝을 꾸린 다음에 바깥동정을 살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와서는 창고와 담벼락샛길을 따라 미리 약속한 지점까지 뛰어갔다.
이 때가 제일 중요한 때. 정문 위병소는 우리편이니까 상관없지만, 동문과 남문에도 보초가 있고, 그 사이에는 1시간에 한차례씩 동초가 지나가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을 잘못 맞추면 동초와 부닥쳐 만사가 깨지고 만다.
바로 그 틈을 이용해서 담 밖으로 던져야 했다. 이를 받아 담밖에 대기하고 있던「가네다」가 재빨리「리어카」에 싣고 갔다.
실로「루팡」을 뺨칠 만큼 기민한 동작으로 이어진 행동이다. 대개는「시미즈」군이나 조군이 열쇠를 맡고 내가 운반을 담당했다. 내가 힘이 제일 세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5, 6차 이 짓을 한 것 같다. 그러나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
등화관제로 천지가 깜깜한 것도 큰 덕이었을 것이다.
훗날 만주나 중국에서 돌아온 학병들도 비슷한 일들이 많았다고 들었지만, 일본 영내에서 거사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창고 속에서 담요에 짐을 꾸릴 때 바람소리만 나도 움찔 놀랐다. 정해진 담벼락에 짐을 넘겨주어도 그 단추공장 주인이 아무 기척이 없으면 사람 죽을 지경이었다.
들키면 막 가는 판, 생명을 건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지금 같으면 엄두도 못 낼 그 일을 그 때는 서슴없이 해치웠다.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다. 가책은커녕 어떻게든지 좀더 많이 훔쳐내려고 애썼다. 우리는『홍길동 이가 바로 이런 일을 해서 의적이란 말을 들었을 거야』『이것도 독립운동이야』라면서 웃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삐가 길면 잡힌다던가,「가네다」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우리는 드디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 날인가, 취침나팔이 울리고 소등도 끝난 뒤였다. 울적한 심사로 잠 못 이루고 있는 나에게 옆에 있던 조진대군이 신호를 보내왔다.
밖에 나가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잠 못 이루는 판에 잘됐다 싶어 선뜻 동의했다.
우리는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한참 뒤 베개를 모포 속에 넣어 잠자는 형체를 만들어 놓고 슬그머니 내무반을 빠져나갔다.
발짝 소리가 나지 않게「지까다비」를 신고 우리만이 아는 담벼락을 넘었다.
행선지는「가네다」집. 서로 말은 안 해도 발길은 같았다.
담에서부터 약 1백m쯤 구보했다. 그런 뒤 기마대와 육군병원 사이의 밭고랑을 살살 기어가면 이내 단추공장「가네다」네 집이 나온다.
여러 차례 암야행을 했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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