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경제 view &

나눠먹기식 정부 연구 예산, 다시 생각할 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송기홍
딜로이트컨설팅 대표

전 세계인들이 음악을 듣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고음질의 오디오 압축 기술인 MP3 는 독일의 프라운호퍼 연구협회(Fraunhofer Gesellschaft)에서 개발됐다. 이 기술 하나로 협회가 거둬들인 로열티만 수천억원이 넘는다. MP3 관련 라이선스 수입은 다른 연구에 투자되어 또 다른 혁신 기술과 제품으로 이어졌다.

 프라운호퍼 연구협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재건을 위한 응용연구개발을 목적으로 1949년 뮌헨에서 창립됐다. 초기에는 바이에른 주정부의 후원을 받는 지방단체 성격이 짙었으나, 점차 독일 연방정부와 지방자치단체·대학·기업체 등이 폭넓게 참여하는 독일 최대의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2만3000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독일 전역에 퍼져 있는 67개의 특성화 연구소에서 보건·환경, 안전·보안, 정보통신, 교통·수송, 에너지, 생산효율 등 6개 영역으로 나누어진 응용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전 유럽에서 실용성 있는 특허를 가장 많이 출원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12년 700여 건의 독일 발명품 중 70%가 협회의 특허를 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실적 자체보다도 정작 협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프라운호퍼 모델이라고 알려진 연구개발 예산조달 및 연구 우선순위 설정 방식이다. 2012년 연구소의 예산은 19억 유로(2조8000억원). 이 중 16억 유로를 다양한 산업 및 공공 부문으로부터 의뢰받은 연구용역으로 충당했다. 5~10년 이내에 상용화하기 어려운 일부 기초연구만 연방정부나 지방정부의 용역으로 이뤄진다. 최근 신소재, 차세대 에너지, 반도체 분야의 눈부신 연구 성과에 힘입어 유럽연합·미국·아시아 소재 기업으로부터의 국제연구용역도 늘어나는 추세다. 연구 성과나 발명품뿐만 아니라 연구개발 자체의 수출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얼마 전 새롭게 문을 연 우리나라의 모 국립연구원을 방문했다. 저명한 과학자인 원장으로부터 연구원 예산이 수백억원에 달하지만 정작 관심 있는 분야의 연구를 추진할 연구비 마련이 어렵다는 애로사항을 들었다. 관련 부처에서 연구 예산을 배정할 때 이미 전부 꼬리표가 붙어 있어 새로운 연구를 추가하거나 실적이 부진한 연구의 예산을 삭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14년 우리 정부의 예산 중 연구개발(R&D) 관련 예산은 전체의 5%에 달하는 17조5000억원이다. 절대 규모뿐 아니라 비중 면에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성과 평가와 적절한 예산 재배분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전문성이 없는 공무원이 예산 배정을 맡거나 몇몇 교수들이 모여 예산을 배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책 연구기관들도 정부 보조금에 대한 의존 모델에서 탈피해 응용연구와 기초연구를 병행하여 자체적 재원 마련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프라운호퍼 연구협회의 각 연구소들은 연구 주제나 분야에 대한 결정을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한다. 그 대신, 철저한 시장원리의 적용을 받아 연구 프로젝트 수입과 로열티 등으로 연구비를 마련해야 한다. 좋은 성과를 내는 연구는 관련된 후속 연구의 주제 선정, 재원 마련, 유능한 연구자의 참여 증가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지속적인 연구 모멘텀이 마련된다. 반면, 산업이나 외부 기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연구는 도태된다. 협회는 70년대 이후 이 모델을 고수하고 있으며 영국 등 많은 유럽국가들도 이미 정부 R&D 예산 배정에 프라운호퍼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창조경제가 제대로 자리 잡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소프트웨어·콘텐트·정보통신기술(ICT)·항공우주기술 등 창조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열거되는 산업들의 주요 연구만 해도 정부의 지원 가능 범위를 훌쩍 넘는다. 정부가 이런 연구들을 모두 지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결국 우리나라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공부문의 예산으로 초기 시동만 걸어주고 민간 부문의 자본과 창의력을 자율적으로 참여시키는 프라운호퍼식 R&D 모델의 적극적 수용이 필요하다.

송기홍 딜로이트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