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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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가는 아직 유보되어 있다. 일화들은 편편이 알려져 있지만, 그 뿐이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세기의 터울은 한 인간을 평가하는데 부족한 시간은 아닌 것 같다.
이 박사가 독립 협회의 창설에 참가한 것은 약관 무렵이었다. 그의 공인으로서의 생애는 그 후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기까지 무려 64년에 이른다. 그는 생애의 전부를 공인으로 보낸 셈이다. 옥중 생활, 혹은 망국의 우국 지사로 독립 운동가로, 광복 후엔 국가 창설자로, 대통령으로, 만년엔 국부로, 다시 망명 정객으로…, 실로 그는 한 인간으로는 풍운의 생애를, 한 공인으로는 난세를 유감없이 살고 간 인물이다.
정치인에겐 필요한 조건이 몇가지 있을 것 같다. 범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첫째는 개성, 째는 인간 관리의 능력, 세째는 행동력, 네째는 「비전」. 정치인 이 박사에 대한 기초적인 평가도 우선 이런 조건에 견주어 본다면 편견에서 다소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박사의 개성은 한마디로 군주적인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해방후 미군정의 정치 고문을 지냈던 「버치」는 한 외국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이 박사는 결코 「파시스트」가 아닙니다. 그는 「파시스트」보다 2세기 앞서 있습니다. 순수한 「부르봉」파지요』.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는 말로도 유명한 절대군주였다. 하긴 이 박사 스스로도 『나의 백성은 나와 같이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동란후 환도 때 신익희 등 국회의 대표들이 이 박사에게 서울 사수를 어겼으니 사과해야한다고 건의했었다. 이 박사는 『「과인이 덕이 없어」하고 말인가!』하고 반문했었다. 그것은 민선 지도자로서보다는 군중 의식의 표현에 가깝다. 그가 헌법을 초월하는 위치에서 나라를 다스린 것도 그런 일맥일 것이다.
인간 관리의 능력은 다른 일화에서도 그 기교를 찾아 볼 수 있다. 자유당이 강온으로 나뉘어 다툴 때의 일이다. 경무대를 찾아간 당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강경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잘못했으면 그를 벌하고, 온건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잘못했으면 그를 벌하라』고.
이것은 인간을 끌어들이는 이 박사 특유의 흡인력인 것도 같다.
그에게 행동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세계의 여론이 그를 고립시킬 것쯤은 뻔히 알면서도 반공 포로를 암야에 석방한 일이 있었다. 그의 외교 「패턴」은 독선이라고도 하지만, 달리는 행동력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어떤 「비전」을 갖고 있었을까. 반공을 제외하고는 얼른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유보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오늘 그의 탄신 1세기를 맞으며, 아직 그에 대한 모든 질문에 해답을 할 수 없는 것은 왜 그런가. 언젠가 역사는 그 답을 찾아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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