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백」(feed bac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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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민투표가 있기 2, 3일전에 미국의 미래학자「허먼·간」박사가 내한하여 어느「세미나」에 참석하였다는 보도를 읽었다. 기자회견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낙관시한 그의 의견을 읽고 오비이락의 감이 있었다.
통계학자의 추산에 따르면 금세기 말의 세계인구는 60억을 넘을 것으로 내다본다. 더욱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는 지상의 인구가 2백50억에 도달하는 날을 서기 2025년11월13일로 잡고, 그날은 인류가 질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현대판 공상 소설이라 할 만하다.
과학자들의 보험에 의하면 고양이는 겨우 30초의 미래를 내다본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 인류는 거의 무한한 미래를 내다본다고 한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 인간에게는「타보」를 저장할 수 있는 능력과「기호」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원래 정치학·경제학·사회학 기타 기술분야 마다 그 분야에 고유한 대상에 따라 각기「미래」를 논하여 왔었다. 그러나 오늘날의「미래학」은 인간사회의「미래」라는 성격 때문에 자연 과학은 물론 인문·사회의 제 분야와 종교·예술분야까지를 총망라한 통합체로서의「미래학」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논리일 것이다.
이와 같이「미래학」은 그 대상이 불확실한 인간 사회의「미래」라는 문제 때문에 그 체계를 세우는데에 많은 난관이 따른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미래」의 선택지중 인간이 그 어느 한가지를 선택 결정해야 할 때는 인간의「의지」는 가변적이라는 것이다.「의지」는 항상 논리적 필연성만으로 정해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또한 큰 난관의 하나가 될 것이다.
가령, 정치 문제에 관련된 미래의 예측은 경제분야에서의 예측에 비하여 그 난관이 더 많이 따른다는 사실은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언제나 이론과 현실과의 사이에는 이 같은 커다란 차이가 있지 않은지 실제 사용되는 것은 어떠한「예측」보다는 미래에 대한 구성적 방법에 의한「계획」이 우선 시도되고 있음을 본다.
즉 전습적 사회적 제약과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으로 미루어, 온갖「추세」를 그대로 미래까지 연장시켜 나가려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이 같은「방법」에는 큰 결함이 있다 하겠다. 이 같은 추세로 나가려는 사회가 과연 우리의 소망대로 이루어진 사회가 되지 않고 전혀 빗나가고 마는 경우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지상 공론이 아닌 현실인 경우 시행 착오가 생길 경우 너무도 큰 희생이 따른다 하지 않겠는가. 바람직한 것은 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일정한 주기마다 세밀한 검토와 평가를 통해 궤도를 수정하면서 점차 목표에 접근시켜 나가는「피드·백」의 원리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부패의 성행과 생활의 낭비와 외형에 치중된 생활 습성, 실력자가 실력을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학생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이 같은 부조리를 그대로 둔다면 그 같은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때는 화급히「피드·백」의 이론을 응용해야 할 때다.
우리 사회에서는 GNP(국민개인소득)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강조되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미국의「그로스리·스토어」(식료 잡화점)에서의 1, 2「달러」짜리「와이샤쓰」는 한국 제이고, 며칠간의 해수욕을 위해 아무렇게나 들고 다닐 수 있는 몇「달러」짜리「트랜지스터·라디오」도「마이애미 비치」에서 눈에 뛴다. 그것도 한국 제품이다.
모방만 해서는 국제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독창적인 기술개발이 요구되는 때다. 문교부 연구비가 5개년 계획에 치중되기보다는 기초 과학에서부터 착실히 해 나가는 것이 긴 안목으로 봐서는 더욱 긴요하다 하지 않겠는가. 임정대<연세대교수·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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