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 『중앙 문예』 당선 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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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그 그늘에 잠시 쉬고 있노라면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그때, 그대의 시선은 자유롭고 알리라.
오솔길에 아무렇게 펴 있는 풀잎들도
저마다 한 몫으로 살아 있음을.
그러나 나는 아직 아지 못한다.
오솔길에 풀 한포기 흔들리는 까닭을.
풀 한포기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들고 지나는 바람을,
바람 한자락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바람이 지나가면 풀 한포기 흔들리고
바람이 지나지 않아도 풀 한포기 흔들린다.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흘러서 어디 가는가.
물 한방울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물 개울의 흐름도 아지 못한다.
물 개울로 흘러 보지 않고서는
저 강의 물방울들 모임도,
바다를 떠돌아 보지 않고서는
바다의 출렁거림도 아지 못한다.
내가 물 한방울이 되지 못하는데도
바다는 밤늦도록 출렁거린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학자들의 책을 밤늦도록 읽는다.
밤 새워 읽은 뒤
내 방종의 뜰에 핀 꽃 몇송이
자기를 키운 가지를 떠나
옆으로 툭 불거졌다.
옆으로 툭 불거진 엉겅퀴는
바람이 웬만큼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는 것은 거짓의 풀잎, 거짓의 바람,
나는 웃는다.
그때, 낙엽이 웃음처럼 지고
내 방종의 뜰에도 겨울이 왔다.
밤에 오는 눈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먼 곳에서
누가 눈을 눈이라고 하였는가.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밤 새워 눈이 와도 녹아버리고
내가 찾은 한 마디의 말
아침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겨울은 그러나 어김없이 왔고
이 겨울 나뭇가지를 떠나 방황하는 새
비로소 처음 추위를 느낀다.
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내 한 때 방종의 뜰에도
겨울 짧은 해 빨리 지고
밤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속으로 제몸을 감추기 시작할 때
나는 무엇을 조금씩 알아 가는가.
그러나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주: 「빌헬름·마이스터」는 「괴테」 작품의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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