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소목장 2대 천상원씨 댁|<제자·일중 김충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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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1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은 소목장 천상원씨(49)는 충무시로 기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 상량식을 올리는 중이었다. 막 대들보를 올린 귀목 머릿장 앞에 술상을 차려놓고 막걸리를 한 사발 따라 휘돌린 후 그는『장도 집이나 마찬가지로 탈이 없어야제』라고 말했다. 한 쌍으로 된 이 귀목장은 주문받은지 1년이 넘는 것이다. 천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오래두고 짜야『그동안 병이 날 것은 다 나기 때문에』두고두고 탈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개씩 가구들이 양산되는 세상이 되었어도 천씨는 어려서부터 배운 나무 다루는 법을 지켜가고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눈앞에 둔 조용한 항구 충무는 옛날부터 장롱과 갓과 나전칠기로 유명한 곳이다. 주변의 수많은 섬들에 뒤목재료인 좋은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해변에는 아름다운 조가비가 흔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이름난 이 지방 명장들 중에는 천상원씨의 선친인 천철동씨의 이름이 들어있다. 담백한「성태내문장」이 특기였던 천철동씨는 10여년 전부터 그의 솜씨가 문화재지정을 받게될 것이라는 소문만 듣다가 작년에 77세로 별세했다.
『아버지가 안 돌아가셨으면 아버지가 지정을 받았을 것인데, 그거 하나가 안타깝습니다.』무뚝뚝하고 말이 드문 천씨는 이렇게 그의 애틋한 정을 표현한다.
천철동씨의 7남매 중 맏이었던 그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아버지의 공방에 들러 이일 저일을 재미 삼아 배웠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목수 일을 배우라고 권하지는 않았으나 호기심을 보이면 자세히 가르쳐 주곤 했다. 그때부터 30년 이상을 아버지 밑에서 익힌 무늬장 솜씨로 그는 이번에 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충무장롱의 독특한 한「스타일」인 이 무늬장은 자연색 그대로 칠하지 않은 나무에 가늘게 포갠 다른 빛깔 나무를 붙여 수놓듯 섬세한 무늬를 넣고 있다. 무늬는 아자형인데 모양에 따라 귀내문 혹은 성태내문이라 부르고 무늬가 없이 날으로만 3줄 들어간 것은 삼호장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감나무에 들어있는 흑새를 잘라 흑선으로 쓰고 노랑선은 개옻나무를 사용했으나 요즘에는 버드나무에 물을 들여 쓰고 있다. 담백한 나무빛깔에 아련하게 들어가 있는 검정·노란색의 섬세한 무늬들은 이 자그마한 2층 장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더욱 소중하게 해준다. 장 1벌감의 무늬를 넣는데 반년이상 걸린다는 외곬의 점성이 깃들여있기 때문이다.
전국을 통틀어도 남아있는 장롱이 얼마 안 될 것이라는 이 무늬장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능보유자인 천씨는『일제 36년이 원망스럽다』고 말한다. 그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우리의 고유한 민예품들이 끊기지 않았고, 충무의「성태내문장롱」도 이렇게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고있다.
천철동씨 생존 때에도 그들 부자는 겨우 7년 전에 성태내문장롱 l벌을 팔았을 뿐이었다. 그것도 주문을 받아 만든게 아니고 주위의 권고로 서울에서 열리는 공예전에 출품했던 것이었다. 작년에 다시 1벌을 만들어 민속공예전에 내놓았을 때는『무늬를 붓으로 그렸느냐』고 묻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1㎜ 두께로 나무를 잘라 남들이『그렸다』고 의심할 만큼 정교한 무늬를 나무 속에 심을 수 있는 아까운 솜씨를 썩힌 채 천씨 부자는 잡목수로 생계를 이어왔었다. 그의 공방에서 현재 만들고 있는 귀목장도 어쩌다 몇 년만에 들어온 주문일 뿐 창틀이나 문짝을 짜는 일이 오랫동안 그의「본업」이었다.
준비성 많은 그의 부친은 노후의 솜씨를 다해 생대장롱 3벌감의 무늬를 완성해놓고 그 재료가 쓰일 날을 기다렸었다. 그러나 그 재료들은 10여년이 넘도록 장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채 남아있다. 아들은 고인이 남기고 간 윤나는 연장들과 그 재료를 매만지며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생계만 허락된다면 팔리든 안 팔리든 솜씨를 다해 온갖 것을 만들어서 전시회를 열고 싶어요. 구색을 맞추려면 한 20종은 만들어야 할테니 짧게 잡아 5∼6년은 걸리겠지요. 전시를 하면 사람들도 인식이 달라지기 않겠습니까.』그는 오래 쉬었던 운동선수가 뛰고 싶어하듯『솜씨를 다해 손을 놀려보고 싶다』고 간절한 소원을 말한다.
기능보유자 지정을 받은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 보라고 권한다고 한다. 서울에는 성태무늬장롱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도 서울로 가고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집을 처분하려고 내놨지만 충무가 온통 굴양식·미역양식으로 망해놔서 매매가 되어야지요. 애들이 많아서 생활터전을 옮기기도 힘들구면요.』
그는 알뜰한 부인네들이 머릿장에 치마저고리를 착착 개어 넣던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고, 목수는 나무를 아끼고 사람들은 목수의 솜씨를 아끼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작고한 남편을 따라 좋은 나무를 사러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다는 어머니 이소방씨(69)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영감은 나무 고르는데 참 까다로웠다』고 전하고『그래서 영감 손에 나온 장롱은 몇10년이 가도 탈나는 법이 없었다』고 자랑하기도 한다.『좋은 나무든 헐한 나무든 적어도 3년 이상 재목을 재워두었다가 써야 하는데 그렇게 오래 말려도 마지막 한 달은 꼭 방에서 같이 살면서 말려야 나중에 방에 장롱을 들여놓을 때 변하지를 않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배우려하지 않으니 안타까워요.』
천씨가 만드는 2층장 1벌은 20만원 이상을 줘야한다. 무늬를 넣는 어려움도 있지만 이처럼 까다롭게 재목을 다루고 또 채색장이 아니므로 나무무늬에까지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한 뿌리 느티나무라도 잘라보면 새알무늬, 물결무늬, 산수무늬 등으로 나뭇결 모양이 각각 다르다. 장롱의 중층·하층 등을 일정한 모양으로 맞추자면 재목손실도 많게 된다. 이렇게 남은 재목으로 만든 장은 그래서 색깔을 입히게 된다.
천철동씨의 아들 중에는 상원씨 이외에 건축목수가 둘. 나전칠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상원씨의 6남매 중 장남 문갑씨(25)도 서울미아리에서 나전칠기공장을 하고 있다.
어려서는 수산학교에 들어가 바다로 나가고 싶었으나 가난해서 못 갔고, 장성한 후에도 이 일을 그만두려고 몇 번씩 난리를 치르기도 했었다는 그는『이제와 생각하니 아버지 일을 이어 받은게 다행이다. 이제는 마음껏 연구하고 마음껏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밖에 없다』고 말한다. <장명수 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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