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5)<제자 김태선>|<제41화> 국립 경찰 창설(43)|김태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남로당의 마수>
구속된 13명의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들의 공산당과의 접선 경위가 낱낱이 밝혀졌다.
이들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공산당인줄 모르고 접촉했지만,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노익환 의원의 경우, 그가 남로당 중앙위원 이삼혁을 처음 만난 것은 48년12월 하순이었다.
이보다 앞서 국회에서는 한·미 협정 인준 문제를 둘러싸고 노 의원 등 5명의 의원이 퇴장하고 반대 성명을 발표한 사실이 있었다.
그 뒤 며칠 안돼 국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노 의원 앞에 한 중년 신사가 다가섰다.
『노 의원님이시죠?』
『그렇습니다.』
『잠깐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 시간을 낼 수 있을까요.』
『오늘은 시간이 없습니다.』
서 의원은 이 낮선 신사가 흔히 찾아오는 청탁객 인줄 알고 만나려는 용무를 물어보지도 않고 돌아서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지 사흘 뒤 노 의원은 국회회의장 출입문밖 복도에서 다시 그 중년 신사를 만났다.
노 의원은 더 이상 신사를 뿌리칠 수 없어 그를 따라 시공관 (현 명동 예술극장)앞까지 갔다.
노 의원은 「고향」 다방에 가서 차나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 했으나 이 신사는 굳이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며 충무로 4가의 모 중국 요리 집으로 안내했다. 방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이 신사는 『저는 이삼혁이라고 합니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이삼혁은 이어 『저는 노 의원께서 국회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국민들 가운데는 노 의원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앞으로 저는 노 의원을 적극 돕겠습니다』고 노 의원을 극구 칭찬했다.
『저를 지지해 주신 다니 감사합니다.』 노 의원은 형식적으로 대답하고 그 날은 그대로 헤어졌다. 며칠 뒤 이삼혁은 노 의원을 이번에는 당시 장안에서는 일류요정이던 명월관으로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도 이는 『현 국회에서 소장파 의원들이 민주노선을 지향하며 외군 철퇴, 한·미 협정 반대 등을 주장하는 것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 퍽 유익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술잔이 오가면서 두 사람은 마치 10년 지기나 되는 것 같이 친숙해졌다.
그후부터 이는 사흘이 멀다하고 노 의원을 찾아갔다.
해가 바뀌어 49년2월이 됐다. 노 의원이 소장파의원을 중심으로 화평 통일안을 제출할 무렵, 하루는 노 의원이 『이 선생 소속 단체는 어디오」하고 물었다.
이는 『남로당이요』하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노 의원은 당황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노 의원도 남로당에 입당하시오. 지금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화평 통일안도 남로당 지령의 일부이니까요. 만일 노 의원이 반대하면 당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도 불사하겠소. 당의 비밀은 지켜져야 하니까요.』
이삼혁은 노 의원을 정면으로 협박했다.
그 해 2윌6일. 노 의원은 하는 수 없이 남로당에 입당해야 했다. 이날부터 이삼혁과 노 의원과의 관계는 친교를 떠난 주종관계로 바뀌었다. 노 의원은 매일 같이 지정한 장소에서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국회의 움직임을 보고해야 했다.
이문원 의원도 노 의원의 경우와 비슷했다.
48년1월 중순 출신구로 내려가 강연을 하고있던 이 의원은 친구인 오관 변호사로부터 『빨리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이 의원이 서둘러 상경하자 오 변호사가 서울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요?』
『좋은 친구를 소개하려고 그랬소.』두 사람은 오 변호사 집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오 변호사는 이 자리에서 남로당원 하사복을 이 의원에게 소개했다. 물론 남로당원인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이 의원은 자기와 정치 노선을 같이 한다는 말에 하와 10여 차례 만나는 가운데 서로 의사가 통함을 느끼고 좋은 친구를 얻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는 『이 의원, 사실 나는 북조선에서 파견된 남로당원이요. 이 의원도 우리 당에 가입하시오』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이 의원은 원래 사회주의자로 5·10 선거 때도 남로당을 이용, 당선하는데 덕을 본 일이 있고 또 정치인으로 활동하는데 필요한 자금도 필요했기 때문에 입당을 승낙하고 말았다.
그 뒤 이 의원은 하의 지령을 따르겠다는 조건으로 49년2월∼4월까지 5∼6차례에 걸쳐 수10만원을 얻어 썼다. 공산당 지하운동에는 종적 연락이 있을 뿐 횡적 연락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노 의원에게 접근했던 이삼혁은 「하사복」이란 별명으로 동시에 이문원 의원과 접촉했지만, 노·이 두의원은 이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삼혁과 하사복은 이명동인이었던 것이다.
국회 「푸락치」 사건은 서울 지방 법원에서 50여명이라는 유사이래 처음 보는 다수의 변호인이 입회한 가운데 장기간 심리를 거듭했다. 50년3월14일 노익환·이문원은 징역 10년, 나머지 전원은 2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되면서 유명했던 국회 「푸락치」 사건은 매듭지어졌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