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배후 색출은 일본의 책임 또다시 역사적 과오 되풀이 말라|정명덕(대한변협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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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 고등법원 형사 제2부에서 문세광의 항소가 기각됨으로써 결국 문세광은 1심판 결과 같이 사형이 재확인되었고 이제는 본인의 상고에 의하여 대법원에서 법률문제 적용에 위법이 없나를 다루는 절차만이 남았다.
따라서 문세광의 범죄사실 자체에 대하여는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법률상 확정되었다.
문세광의 1심 및 2심에 있어서의 진술내용·신문보도 등을 통하여 알려진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본다면 그는 일본에서 빈곤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일본인으로부터 천시 받을 대로 천시를 받아 가면서 고층 「빌딩」의 유리창 닦기·부두노동 등의 험한 생활을 하여 온 자라 한다.
아직 22세라는 정신적으로는 무분별한 영역을 탈피하지 못하고, 따라서 배후에서 소 영웅심을 불러일으키면 쉽게 이에 현혹되고 끌려갈 환경에 있었던 것은 용이하게 짐작이 간다.
여기에 새삼 생각나는 것은 제2차대전 당시 일본의 패전이 눈앞에 보이게 되자 일본 군벌 지도자들은 문세광과 같은 연령의 일본인 청소년들로 소위 특공대라는 것을 만들어 단발군 용기에 신풍호라는 허황된 명칭을 붙여 이에 몸을 싣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터로 몰아넣으면서, 그러한 앳된 청소년들에게 군신이 된다느니, 일본 역사의 천추 만대에 남게 되는 영웅이니 하고 추켜세웠던 사실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세광이 20세 남짓의 철없는 연령으로 한번도 발 디뎌 보지 못한 자기 부모가 태어난 나라인 한국의 대통령을 저격하여 그 나라를 공산주의화하려는데 기폭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그 배후에 줄기차고도 계획적인 조종과 선동과, 그리고 또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이는 문세광의 법정태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제1심에서는 범행 당시의 자기 나름대로의 잘못된 영웅적 기세가 상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으나 제2심에 있어서는 제1심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그릇된 사주에 의해서 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뉘우침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일 장래에 생을 향유할 수 있다면 자기의 조국인 한국을 위하여서는 모든 힘을 다하겠다는 진술을 한 것은 그 심정에 있어서 격단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세광은 그 정신면에 있어서 아직까지 청소년의 영역을 탈피하지 못한 그러한 자임이 명백히 입증된 것이며 이러한 자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 자기 조국의 대통령을 저격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이른데 대해서는 배후에 인물이 있었음이 1번·2번을 통하여 명백히 나타났다.
그런데 상금 우리들은 본 건 범죄사실에 대한 일본 수사당국의 괄목할 만한 수사진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음은 심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한 8·15직후 한국 국민이 비통과 분노에 싸여 있을 때 일본 외무성당국은 경망하게도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하여 법률적 책임도, 도의적 책임도 없다는 태도를 취했고 일본 언론도 이에 동조함으로써 한국민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였고, 한국민의 분노가 극도로 고조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달은 일본은 정계의 대 원로인 「시이나」를 특사로 한국에 보내어 그 잘못을 진사케 하고 모든 배후 인물을 색출하여 그 진상을 한국민에게 알리고 일본법에 의하여 처벌하겠다는 다짐을 한바 있다.
일본은 마땅히 스스로가 그 특사를 보내어 약속한 바를 성실하게 이행하여야 할 시기는 바로 이때라고 본다.
우리 한국민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웃나라 일본으로부터 항상 피해만 보아 온 것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먼 역사는 그만두고라도 약4백년 전의 풍신수길의 이유 없는 한국 침입,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초에 이른 한국의 불법점령, 이러한 일본의 만행이 한국민에게 준 그 피해는 헤아릴 수 없으며 아직도 한국민의 감정으로서는 이러한 모든 사건이 완전히 정리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또 이조 말엽 고종 때 민비를 시해한 일본 부랑배들의 배후에는 그 당시 주한 일본 공사인 삼포가 조종 지령한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명백한 사실로 일본인 스스로가 폭로함으로써 공지의 사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온갖 수단으로 은폐하고 일국의 황후를 시해한 삼포를 소환하는 데만 그쳤다. 그리고 직접 민비를 시해한 일본 부랑배들은 한국 정부 수사당국이 직접 수사에 임하면 그 진상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여 일본으로 이들을 압송하고 일본국 광도재판소에서 형식적으로만 재판을 하여 결국 방면해 버리고만 사실을 한국민은 아직 잊지 않고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이러한 사건들을 회상하고 일본 위정자들은 저격사건에 관련된 일본에 있는 모든 배후자들을 성심껏 철저히 조사하여 전술한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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