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이세돌 MVP '자존심 大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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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9단은 지난 화요일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이란 대기록을 달성하며 뭍 고수들 위에 우뚝 섰다.

그러나 승부세계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이창호 앞에 때맞추어 '적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 적수는 불과 20세의 청년. 가냘픈 몸매 속에 피를 보고야 마는 야성과 놀라운 파괴력을 감추고 있는 이세돌3단이다.

그리고 지난해 이창호9단을 제치고 최우수기사(MVP)에 올랐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두 기사는 토요일(22일) KT배 준결승전에서 맞선다. 그리고 다음주 화(25일), 목(27일), 토(29일) 3일간 LG배 우승컵을 놓고 미뤄두었던 혈전을 재개한다.

이 4연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싸늘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이창호는 무적이지만 이세돌도 강하다. 이창호의 왕관을 노리는 이세돌의 날카로운 칼끝에는 삼엄한 살기가 감돌고 있다.

KT배 마스터즈 프로기전은 제한시간이 불과 20분인 속기전. 바로 이 '초스피드 속기'가 변수를 안고 있다. 속기는 물론 수읽기가 비호 같은 이세돌의 전공과목이다.

이창호9단도 속기전에서 숱한 우승을 거둔 사람이지만 속기는 왠지 이세돌3단과 궁합이 더 맞아보인다. 순전히 이미지로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표 참조) 두사람은 지금까지 속기전에서 다섯번 대결해 이창호9단이 4승1패로 앞서고 있다.

두 기사의 총 상대전적은 이창호 쪽이 13승8패로 우세한데 이 중 속기를 빼면 9승7패로 굉장히 근접한 스코어를 보여주고 있다. 이창호 쪽이 오히려 속기에서 전적이 더 좋다. 이미지와 실제가 영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KT배라는 이 전초전은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다음주에 이어질 LG배 세계기왕전(우승상금 2억5천만원)은 현재 1대1로 팽팽한 스코어를 보이고 있다. 5번기가 3번기로 줄어든 상태인데 KT배의 승패에 따라 이 얼음장같은 대결구도가 영향을 받을 것은 자명하다.

이창호9단은 올 들어 세계대회인 도요타.덴소배와 춘란배를 연속 제패하며 쾌조의 진군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대회에서 무관에 그친 것이 돌부처 같은 이창호9단에게도 아픔을 주었던 것일까. 그 '무관'을 이유로 MVP를 이세돌3단에게 넘긴 바둑계를 질타하고 있는 것일까. 이9단은 이 기세가 유지된다면 올 한해 동안 열리는 모든 세계대회를 우승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세돌3단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MVP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주겠다."

누가 진정한 MVP인가는 이번 4연전에서 판가름난다. 한두번의 승부가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이번 두기사의 승부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많은 극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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