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청은 중공 제1인자가 될까|그의 정치행각과「모의 의중」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모택동(81) 중공당 주석의 와 병설과 주은래(76) 수상의 정양생활은 모-주가 다같이 자연인으로서 종말에 다다랐음을 시사, 후계자 선정작업의 필요성을 배증 시켰다.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처며 당정치국원인 강 청(59)을 그의 후계자로 의중에 두고있다는 보도가 연일 흘러나와 관심을 끈다. 이 보도가 막연한 것이긴 하지만 최근의 중공사태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모가 그의 혁명사상과 정신을 가장 철저하게 믿고 실천에 옮길 인물로 강 청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가설은 그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고 있다.

<유소기 축출에 선봉>
강 청은 모라는 부동의 배경을 갖고 있다. 상해의 단역 영화연극배우였던 남 관(강청의 예명)은 30년대에 중공당에 입당, 38년 연안으로 가「마르크스-레닌」학교에 입학하여 모의 제자로 모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모와 강은 고위 당료 들의 세찬 반대를 뿌리치고 39년 혼인, 강청은 문혁 이전까지 거의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청은 64년 6월 중국고유의 경극을 현재의 혁명적 주제에 맞춰 개혁해야한다고 한 회의에서 연설함으로써「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의 정지작업을 마련했다.
다시 말하면 강청은 당시 유소기 국가주석 등의 당 실권파에 눌려있던 모의 권력회복에 선봉으로 횃불을 치켜든 것이다. 강청의 문혁 활동은 정치적으로 모에게는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

<군부 득세…한때 잠잠>
강청은 장춘교·요문원·왕홍문 등 상해의 젊은 혁명가를 주위에 집결시켜 문혁을 성공시키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구전대회(69년)에서 강은 당 정치국원에 피선됐으나 임표파의 군부가 득세함으로써 한동안 잠잠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71년 9월 임표의 군사「쿠데타」미수사건 이후 강청은 상해 파를 적극후원, 73년 구전대회에서 임표 세력을 배제시키고 왕홍문을 당 서열 3위로 부상 시켰다.
구전대회 이후 강청의 정치적 권위는 부동인 것 같으며 74년에 들어와 주 수상의 와병과 더불어 강청에게는 유리한 사태진전이 있었다.
첫째 비림비공을 통해 공·맹의 삼강오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열시킴으로써 과거의 전통적인 남존여비 의식을 타파하러 하고있고 또 사실상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동양 전래의 남성우위사상에 대한 반격은 실로 중대한 음모가 숨겨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즉 이것은 모가 강청을 그의 후계자로 내정했을 때 여성이라는 약점이 몰고 올 사태에 대한 일종의 중화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두드러진 대외활동>
특히 인민일보의 모 어록 난에는『시대가 바뀌어 오늘날 남녀가 평등하며 남성동지가 수행할 수 있는 어떤 과업도 여성동지 역시 수행할 수 있다』는 모 어록을 자주 실음으로써 모의 강청 의중 설에 심증을
주었다.
둘째 금년 중공의 논조에 주목할 점은 주시황 이라든가, 법가인 이사 등과 같은 고대의 사실을 들추어내서 현대 중공의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우화적 수법을 통한 논 진은 새로운 사태발전을 조심스러우나 보다 내밀하게 드러내는 효과로 보아서 왕왕 강 청·장춘교·왕홍문 등의 과격파가 주 수상을 정점으로 한 온건파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로 풀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은유법 중에서 최근 북경 대자보를 통해 나타난 것은 당조 칙천무후에 대한 재평가로서 중국 역대왕조 사가들로부터 황음무도한 생활로「악녀의 전형」으로 평가받았던 칙천무후나 여후를 모두 유교의 반동적 덕목과 투쟁한「혁명적 여걸」로 찬양한 점이다.
이러한 평가는 구사회 질서의 이념을 제거하는 주요 방편이긴 하나 모의「여성도 남성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면 모의 또 다른 목적을 칙천무후에 대한 재평가로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주가 병상에 누워있고 모가 권력투쟁을 피해 잠적해있다는 풍설과 함께 특히 강청의 대외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방전문가들은 이것을 모의 강청에 대한 묵시적 선양이 아니겠느냐고 풀이한다.
최근「이멜다」「필리핀」대통령부인이 북경방문 뒤 강청의 권력이 대단한 것 같다면서 주 수상 실서 마련한 일정도 강이 멋대로 취소 시켰다던가,「가봉」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강이 단독비밀회담을 하였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로 중공 안에서 강의 지위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또 금년에 들어 중공의 언론·방송이 강청을「클로스·업」시킨다던가 하는 일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며 건국 25주년 기념식을 전후해 강청은 정치의 핵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칙천무후 재평가>
여하튼 강 청은 모의 신뢰를 받고있는 데다 문혁 파를 중심으로 한 과격파를 손아귀에 넣고 당 군사위에도 막강한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모의 후계자 후보 중 유력한 인물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모와 강청의 결혼대해 팽덕회·가용 등의 고위 당료 등이 모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킨다고 강력히 반발했던 일을 상기할 때 장차 8억 인구의 최고지도자로 강청 옹립은 모·강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엄청난 폭풍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오랜 혁명과정에 깊이 간여했던 군부가 최근 당과 정치에서 소외되어 정권의 교체 시 불만의 변수로 등장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으며 이때 당의 수건 파들이 군부에 합세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강 청의 모 후계 계승에는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

<이수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