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안 맞는 일물일가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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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주요물자에 대한 현행 고시가격제는 동일상품이라면 전국 어디서나 모두 같은 가격을 받도록 한 제도다. 따라서 그것은 흔히 말하는 일물일가의 법칙을 전국에 걸쳐 기계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이다. 만약 소비지인도가격을 기준가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생산지와의 거리여하를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견 아주 그럴듯한 가격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생산지에 가까운 곳에서나 먼 곳에서나 동일한 상품이면 동일한 가격을 받는 것이므로 수요자의 부담은 평등하며, 원거리지역의 수요자가 자칫 겪게될 부담과중의 폐단을 덜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가격제가 아무 탈없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경제적으로 뒤떨어지고 있는 비산업 지역의 수요자에게는 적지 않은 혜택을 주고 경제활동상의 기회균등화를 위해서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급의 측면을 전혀 무시한 기계적 해석에 불과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생산지에 가까운 곳에서나, 먼 곳에서나 다 같은 가격을 받게 하면 생산자나 공급자는 가능하다면 수송비·조작비·관리비 등 비용이 덜 드는 생산지주변 위주의 공급을 피할 것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원거리 지에 대한 공급을 기피하는 경향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일뿐이다.
그렇게 되면 공급받는 근거리 지에서는 전국적 평균가격인 기준가격 적용으로 더욱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으나, 원거리지에서는 공급기피로 인해 품귀현상이 일어나기 일쑤며, 경우에 따라서는 암거래현상도 일어날수 있어 소비자는 부담 경감은커녕 도리어 이러한 기준가격제를 쓰지 않는 경우 보다 더 큰 부담을 감수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행의 기준가격제가 경제원리를 무시하고, 통제행정상의 편의만을 생각하고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 일물일가의 고시가격제는 원거리수요자에게 수송비·조작비·관리비 등의 과중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윤동기에 좌우되는 공급 측의 사정을 전혀 도외시한 것이다. 그것은 시장의 가격기구를 도리어 왜곡시켜 물자의 원활한 수급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고시가격제가 지니고 있는 모순은 비단 지역간의 수급차질을 가져오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고정적인 기준가격제는 수요가 증가하든, 감소하든, 그리고 공급이 증가하든, 감소하든 간에 그냥 강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도 가격기구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으며 수요변동에 따라 달라져야할 산업의 조정력을 잃게 하는 것이 되고 있다.
이런 뜻에서 고정적인 기준가격에 의한 고시가격제는 그렇지 않아도 차질 요인을 안고 있는 수급관계를 더욱 악화하는 추가요인이 되고만 셈이다.
더 말할 나위 없이, 독과점 상품가격의 폐해를 규제하기 위한 일정한 가격 지정제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시장의 가격기구를 파괴하기 일쑤인 고시가격제를 일부러 쓸 필요는 없을 것이며, 또 설령 그런 제도를 일시적으로 써야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과 같이 수급사정의 변동이나 지역 차에 구애받지 않고 고정적 동일가격을 덮어놓고 적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가격기구의 기능을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가격제는 그 자체가 불안요인의 형성을 뜻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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