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의 언덕」엔 다시 시민들 모여들어|급변이나 혼돈 없는 새 민정의 아테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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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년 동안의 군부통치를 청산한 「그리스」를 찾았다. 상오6시. 쓰레기차가 오가고 하얀 제복을 입은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치워간다. 그리고 아득한 벽촌항 시외「버스」가 제시간에 떠난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손이 바뀐다는 어쩌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테네」다. 혼돈이나 법석이 있자면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없다.
지난 3월 「이오아니데스」장군 치하에서 봤던 「아테네」나 「카라만리스」민정하의 오늘이나 이렇다고 달라진 게 없다. 그래서 흔히 『여행자의 눈은 삐었다』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아테네」의 명동인「에모르」가의 잡다함도, 시골길가의 통닭집, 오후의 한적도 그때 그대로다.
좀 달라진 게 있긴 있다. 「헌정의 언덕」인 비었던 의사당이 다시 사람들로 찼다. 「버스」위창에 「카라만리스」수상의 초상화들이 붙었다. 표어나 구호도 없이 그저 「카라만리스!」라고만 적혀있다. 구호가 이런 때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듯하다.
다시 한마디로 한다면 지금도 사회질서의 기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제대로 잡혀있다.
그걸 『역시 민주주의를 2, 3천년 전에 벌써 해봤던 사람들이라서…』한다면 그들을 너무 잘 봐주는 얘기다. 아마 『그건 역시 「터키」덕분이다』하는 게 좀더 근사한 얘길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왜 적국 「터키」덕이냐. 원수의 위협이 있길래 긴장이 있고, 따져보면 이 위협 이 있길래 질서와 충성이라는 것이 생긴 모양이다.
각설, 『이게 우리를 위하는 거다』라고 모두가 할 수 있고, 대부분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원만한 파문도 그렇게 대수로울 게 없다-이런 얘기다.
그러나 「그리스」국민들의 왕정복권에 대한 생각은 좀 판이하다. 「아테네」시민이 열이면 「모시자」할 사람은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한 교수는 손가락 두개만을 펴 보인다.
아닌게아니라 지금 「런던」에 앉아 귀국을 기다리고 있는 「콘스탄티노스」왕을 당장 다시 모셔오자 하는 소리는 암만 귀를 기울여봐야 별로 얻어듣기 어렵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된 사실의 의미를 1968년 군정이 멋대로 만들어놓은 헌법 대신 1952년의 헌법을 회생시키는데 둔다면 왕도 의당히 모셔야 할 노릇이 아니냐. 뿐이랴. 「차라만리스」자기도 11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으면 거의 7년째 귀양살이하는 왕의 쓰라림도 알아모셔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도 일언반구가 없다.
왕을 다시 모셔오자는 소리가 얼른 나오지 않고 있는 제일 큰 까닭은 「콘스탄티노스」왕의 경우 그저 「군림」하고 계셨다기 보다는 「통치」하시려 들었고 그 「통치」하려는 솜씨마저 서툴러 그것이 민족적 통일의 초점노릇을 하기보다는 분열이나 갈등을 조장한 흠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은 통치하지 않는다. 그저 군림한다』는 영국의 경우와는 사정이 다른 셈이다.
통일의 상징이나 충성의 초점이란 것이 어느 나라에서건 필요한 건 뻔하다. 오늘의 「그리스」같이 나라의 안위가 걱정될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콘스탄티노스」왕의 경우 이런 역능을 맡기에 아주 안성마춤이다. 그런데도 오시라는 소리가 열 손가락에 아직은 두개밖에 없다니 『왕 노릇 하기 나름』인가. <아테네=박중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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