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축구 20년] 박윤기, 안정환 발굴·기술전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글 싣는 순서

① 프로축구 20년 변천사

② 명승부 명장면

③ 역대 득점왕 어디서 뭘하나

축구의 묘미는 역시 골이다. 정교한 패스와 치열한 몸싸움도 결국은 짜릿한 '한방'을 위한 전주곡이다.

프로축구 20년, 축구팬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골잡이들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그에 얽힌 사연은 무엇일까. 정규시즌 역대 득점왕들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한국 프로축구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스타 플레이어가 없다?

20년 동안 득점왕은 모두 19명이다. 1985년엔 태국 출신 골게터 피아퐁과 '키다리' 김용세가 12골로 공동 수상했고, 이기근과 윤상철은 두번씩이나 득점왕에 등극했다. 94년까지 득점왕들은 은퇴한 반면 95년 이후 득점왕들은 아직도 그라운드에서 녹슬지 않은 감각을 과시 중이다.

그런데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골잡이인 최순호.김주성.황선홍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최용수(제프 이치하라).서정원(수원 삼성)도 없다. 이는 한국 축구의 근간이 국가대표 위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과거엔 상시 국가대표 멤버로 소집돼 훈련하는 일이 많았다. 당연히 대표선수들은 프로무대에서 뛸 기회가 적었다. 득점왕은 물론 MVP도 대표선수들의 몫이 아니었다. '국내파'니 '해외용'이니 하는 말도 이 때문에 생겨났다.

▶초창기 득점왕

원년 득점왕 박윤기(43)는 프로축구 역사와 인연이 깊다. 유공-할렐루야의 개막전에서 개막 첫 골을 터뜨렸을 뿐만 아니라 1천호 골의 주인공도 그였다. 왼발잡이인 그는 '오다리'라는 별명처럼 무릎이 휜 신체 조건을 최대한 살려 감아차기 기술이 돋보였다.

박윤기는 은퇴한 뒤 89년 서울공고 감독을 맡아 안정환(27.시미즈 S펄스)을 발굴, 키워내기도 했다. 그는 "안정환이 골키퍼를 앞에 두고 툭 찍어 차는 기술은 나한테 전수받은 것"이라고 자랑했다.

2대 득점왕 백종철(42)은 "모 아니면 도"라는 그의 말처럼 세기는 부족했지만 빠른 돌파에 이은 반박자 빠른 슈팅이 일품이었다. 3대 득점왕 김용세는 91년 은퇴 후 축구계를 떠났다.

▶태국에서 온 사나이 피아퐁

외국인 득점왕은 모두 4명. 특히 90년대 후반 이후론 유럽과 브라질 선수들이 대거 영입되면서 마니치.샤샤.산드로 등이 골잡이로 이름을 날렸다. 누구보다 가장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 외국인 선수는 85년 득점왕에 오른 피아퐁(44)이다. 1m76㎝의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한국 축구보다 한수 아래라는 태국에서 왔음에도 그는 정말 기민했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은 "변병주가 빠르다고 했지만 피아퐁에는 못 미쳤다"고 회고했다.

이미 한국에 오기 전부터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피아퐁은 한국에서 세 시즌을 보낸 후 금의환향, 축구뿐 아니라 가수와 배우로도 활약, 현재는 체육계와 연예계에서 두루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기근과 윤상철

91년 포항 전용구장 개장 기념 개막전 포항제철-천안 경기에서 결승골의 주인공은 이기근(38)이었다. 청소년대표 출신이었으나 당시 2군을 전전했던 이기근은 1군 출전기회를 맞아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결승골을 넣으며 그 해 득점왕까지 거머쥐었다. 이기근은 98년 은퇴 후 호프집 등을 차렸고, 현재는 스포츠용품 업체인 사카스포츠의 마케팅 부장을 맡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득점왕은 대부분 포항제철 선수들의 몫이었다. 이회택 감독의 '공격 축구'가 빛을 내 최상국(42)-이기근-조긍연(42)-차상해(38) 등이 돌아가며 득점왕에 올랐다.

LG의 윤상철은 94년 21골을 넣어 아직도 깨지지 않는 한시즌 최다골 기록을 세웠다. 그는 "전반기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으나 후반기 들어 해트트릭을 두번 하고, 여섯경기 연속골을 올리는 등 몰아쳤다"고 말했다. 윤상철은 은퇴 후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지도하다 현재는 해외 연수를 준비 중이다.

최민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