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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정책에 동원되는 근로자 쌈짓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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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경제부문 선임기자

2001년 6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고용보험 운용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요지는 이렇다. ‘출산·육아와 관련된 비용은 국민건강보험에서 지출해야 하지만 건강보험의 재정 형편상 고용보험기금으로 부담하고 있다. 정부는 고용보험기금의 안정적 운용을 위해 비용의 일정 부분을 매년 일반회계(정부예산)에 반영하라. 또 빠른 시일 내에 일반회계와 국민건강보험으로 비용을 처리토록 재정 대책과 제도 개선책을 강구하라’. 당시 노동부 고위 관계자는 “고용보험기금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적금을 붓듯 마련한 돈이다. 세금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가 정책을 집행하는 데 마음대로 끌어 쓰면 안 된다. 국회의 지적은 당연하고 맞는 말”이라고 했다.

 고용보험기금은 실업과 같은 근로자가 위기상황에 몰렸을 때 실업급여나 직업훈련비로 충당하기 위해 적립해둔 돈이다. 정부 정책자금이 아니다.

하지만 국회 결의가 있은 지 14년이 흐른 지금까지 육아휴직지원금이나 출산 전후 휴가비 같은 모성보호정책에 따른 비용은 여전히 고용보험기금에서 나간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모성보호와 관련된 고용보험 지출액은 2조5000억원이나 된다. 정부가 지원한 예산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0억원에 불과하다. 건강보험으로 전환하거나 정부예산으로 부담하는 제도 개선책은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다. 오히려 정부가 이런 편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각종 고용정책이 나올 때마다 고용보험기금이 동원되고 있어서다. 4일 정부가 내놓은 육아휴직 확대에 따른 막대한 비용도 고용보험기금으로 충당한다. 올해에만 6400억원이 들 것으로 추정된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날 “고용보험기금의 재정여력이 많지 않은 상황”이라고 고백했다. 그래서일까. 벌써부터 고용보험 요율을 올린다는 얘기가 고용부발로 흘러나오고 있다. 2016년이 되면 기금이 바닥을 드러낼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란 분석을 곁들여서다. 정부는 2011년부터 두 차례나 고용보험 요율을 올렸다. 매년 1조원 이상 적자가 나면서 기금의 기반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에 기금을 끌어다 쓰고 근로자에게 부담을 전가시킨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근로자가 위기에 몰렸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월급에서 조금씩 떼서 모은 돈을 정부가 마음대로 쓰는 비정상적 관행을 이제는 바로잡을 때가 됐다. 14년 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결의문에 먼지가 너무 두껍게 쌓였다.

김기찬 경제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