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의 노부모 생사확인사업 제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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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남북적십자회담은 지난해 7월 평양에서 가졌던 마지막 제7차 본 회담 이후 만1년만에 다시 실무자회담을 열어 어떻게 해서라도 남북대화의 실마리를 유지하려는 한국측의 성의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0일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 회의실에서 가진 제1차 실무자회의는 그동안 북적이 대화를 기피함으로써 조성된 남북간의 긴장을 어떻게 해서라도 풀고,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한 혈육간의 상봉문제 등에 관해 다시 한번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제의를 했다는 점에서 전세계가 북적측의 반응을 주시하게 되었다.
이번 첫 실무자 회의에서 서울측 대표는 72년8월30일 제1차 본 회담에서 합의된 의제의 제1항「이산가족의 주소와 생사확인」문제를 실현하기 위한 시범적 사업으로「노부모의 주소와 생사확인 및 상봉을 알선하는 사업」을 우선적으로 실현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인륜의 기본이 친자관계에 있음을 생각할 때 1천만 이산가족의 피맺힌 염원을 대변하는 것이며, 분단 24년의 격조 때문에 더욱 사무치게 느껴지는 혈육간의 울부짖음을 절규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고 온 노부모와 자녀들의 생사와 거처를 알려 주자는데에야 어떠한「이데올로기」의 차이나 정략도 개입될 수 없을 것이며, 이번 한적의 제안이 거부될 이유란 적어도 인륜의 가치가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적십자정신은 서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탄우 속에서도 전투력을 상실한 부상병이라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뻗쳐야 하는 인도주의 정신의 표현인 것이다. 그럴진대 역시 그 적십자정신을 표방하고 있는 북한 적십자사라면 비록 남북간에 상이한 이념과 체제로 말미암아 정치적·군사적 긴장이 여느 때 없이 고조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인간으로서의 너무도 당연한 혈육간의 안부전달과 상봉을 알선하려는 사업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작년 11월이래 북적측은 엉뚱하게도 우리의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자에 대한 탄압 등 내정 간섭적인 환경론을 내세워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돼 있던 8차 회담을 거부해 왔던 것이다. 그들이 굳이 그처럼 얼토당토않은 환경론을, 모든 정치적 입장을 떠난 오직 인도적인 문제만을 취급하여야 할 적십자 회담에 끄집어들이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하여 적십자정신을 등진 북적측의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북한공산 집단들은 남북간의 불신을 제거하고, 크고 작은 온갖 무력도발과 상호비방을 중지하기로 서로 언약했던 7·4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에도 오늘까지 계속 93회에 걸쳐 1백69명의 무장간첩을 침투시켰고 작년 서해 사태 이후 4백50회의 해상도발과 월선을 자행하여 왔다. 남북통일의 평화적 방법을 뚜렷이 천명했던 7·4성명이 이와 같이 평양측의 일방적인 도발로 형해화 해 가고 있는 지금 우리가 적십자 회담에 기대를 거는 것은 결코 그들의 무력공갈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끝까지 달성하려는 일념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정체 끝에 모처럼 대화의 돌파구를 찾은 이번 실무자 회담에서까지 북적측이 한적의 제안 내용에 대하여는 감히 반대를 못하면서 8차 본 회담의 서울개최문제에 대하여는 또 다시 그 자가당착적인 환경론을 들고 나와 성의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일단 적십자인 답지 않은 반응으로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 오는 24일에 다시 가지기로 합의된 실무자 회의에서는 적십자 회담에서 도저히 문제가 될 수 없는 환경론 같은 것은 아예 걷어치우고 오직 적십자정신으로 돌아가 성의 있는 대화에 임해 줄 것을 바랄 뿐이다.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과 친척, 그리고 5천만 동포가 적십자 회담에 걸고 있는 기대와 여망은 인도적 문제가운데서도 가장 초보적인 현안문제인 것이다. 북적측은 이 문제에 대해서나마 성의를 표시함으로써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내외에 과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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