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될뻔한 대장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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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해인사 8만대장경이 6·25동란중 네번이나 송두리째 잿더미가 될뻔한 아슬아슬한 고비를 우리공군과 고 효봉스님의 슬기로 벗어났다는 새로운 사실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동란24년만에 밝혀졌다.
첫번째의 위기는 6·25직후. 해인사를 점령했던 북괴군들이 퇴각하면서 이를 소각시키려했던 것을 당시 해인사 효봉스님의 간곡한 설득으로 위기를 벗어났다는것(이대목은 본지『민족의증언』에 기보).
그후 8만대장경은 51년7월부터 12월사이 세차례에걸친 한·미공군합동공비토벌작전에서 미공군으로부터 해인사폭격명령이 내려져 잿더미가 될뻔한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한국공군지휘관의 폭격거부로 화를 면할수 있었다.
낙동강전선까지 진출됐다 후퇴도중 퇴로가 끊긴 북괴군 패잔병들은 공비가되어 해인사주변 가야산과 지리산등에 집결돼있었다. 이때문에 해인사주변에는 매일 수천t의 폭탄을 퍼붓는 맹렬한 토벌작전이벌어졌다.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직접출격, 공비토벌편대를 지휘한 김영환대령(고 예비역준장) 은 『그 사찰에는 몇천명의 공비와도 바꿀수없는 귀중한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 있다』 면서 끝내 해인사폭격만은 거부했다.
또 김대령은 3단계작전때는 해인사를 일부러 폭격하지 않으려고 무리한비행을 하다 12월18일 구사일생으로 낙동강가에 불시착한 일이 있었다. 특히 51년 김대령이 인솔하는 F-51기 편대는 해인사폭격임무를 띠고 현지까지 출동했으나 해인사상공에서 『편대장의 지시없이는 폭탄을 투하하지 말라』는 김대령의 폭격중지 명령에따라 최후의 위기를 아슬아슬한 순간에 벗어날수 있었다는것.
당시 이작전에 참여했던 서상순씨(52·예비역중령·사업)는 『F-51기 4대에 각기5백「파운드」의 폭탄2개와 「로키트」탄6개, 7백50「파운드」의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해인사를향해 출발했는데 마지막 순간 김영환편대장의 1번기가 급선회하면서 폭격중지명령이 내려지자 미군정찰기에서는 성화같은 독촉명령이 떨어졌다』고 당시의 상황을 『보라매』지『공비토벌출격기』에 기록해 놓았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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