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공신력이라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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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녹 통상 거액 부정대출 사건 수사는 일단락 되었다고 하나 그로 인한 파문은 여전히 꼬리를 물고 있다. 정부 및 금융계 일각에서는 땅에 떨어진 금융기관의 위신을 회복하고, 그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 한은 감독원 기능과 각 은행 대출심사제도의 대폭적인 강화문제가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같은 제도상의 개혁이 실행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번 박영복 사건이 남긴 다음과 같은 의혹이 먼저 석연하게 해명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선, 수출이행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신용장만 제시하면 계속 무역금융이 줄이어서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다. 무역금융이 계속 나가려면 수출실적이 양호하다는 판정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의 경우, 수출실적이 좋았었다는 판정을 내릴만한 자료는 하나도 없지 않았는가. 짐작컨대 새로운 신용장으로 계속 무역금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전 신용장에 따른 수출불이행을 기일연장과 한은의 특인(재할인)이라는 합리화 절차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하겠는데 그 과정에서 취급은행이나 한은이 회사의 신용상태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신용장에 기재된 수입원자재인「밍크」인가, 치양모인가 하는 것이 세관에서 어떻게 통관되었기에「토끼털」도 그대로 회사나 보세창고에 입고될 수 있었는가를 아무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수입원자재의 재감정 여하에 따라서 부족채권 예상액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관도 중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만일 신용장 기재물품이 수입되지 않고 그 대신 엉터리 품목이 통관되었거나, 수입된 원자재가 수년간 유출되었다면 어째서 세관에 대한 사기도 가능했던 것인가 하는 새로운 의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한편, 이번 사건이 검찰의 발표대로, 단순한 사기사건이었다면 이 사건의 책임은 오로지 금융기관과 그를 감독하는 감독원 및 재무부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즉 이 사건이 단순한 사기사건이었다면 제도에 맹점이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백인이면 백인이 한결같이 그같은 사기에 넘어가고야만 인물에 맹점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사리가 그러하다면 눈뜬장님만 모여 있는 7개 은행의 간부들과 중앙은행 간부의 인적구성이나 자질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사건에서 농락 당한 대출금들은 그 대출규모로 보아 당연히 모두 은행장이나 이사회가 일단 검토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모두 50명 선을 넘을 것으로 보이는 7개 은행의 임원들 중 단 한사람도 그같은 거액 여신에 따른 문제점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찌해서 은행임원의 선임에 있어 그러한 인선이 가능했던가를 깊이 검토해야겠으며 그러한 인선을 한 당국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또 검찰이 단정한대로 단순한 사기사건이라면 전체금융기관의 임원을 차제에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모든 면에서 시정인의 눈으로도 의문점이 많이 있는데도 누계 70억원 이상의 여신이 수년간에 걸쳐 태연하게 나 갈 수 있는 인적구조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은행을 믿고 거래하기는 꺼림칙하다는 여운을 줄 것이며, 이들이 그대로 임원으로 유임된다면 언제 또 사기를 당할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끝으로 은행의 부족채권에 대한 뒤처리 문제를 철저히 연구해야할 것이다. 사기를 당했으니 은행이 고스란히 앉아서 결연 처분만 하고 말겠다는 것인가. 그 엄청난 손실은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종래의 은행관습은 일선 지점장 급에서는 자기 전행조 대출에 회수 부족액이 생기면 사재로 변상케 하고 있으나 이사회 결의로 나간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관례는 불합리한 것이며 임원들의 무사안일주의를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여신에 대한 회수부족에 대한 책임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책임문제의 소재를 규정화해서 책임경영의 기틀을 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박영복 사건이 단순한 사기사건에 불과한 경우에라도 그 공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금융기관 임원의 질적 향상을 위한 획기적인 인사개혁과 부실대출이 발생했을 경우의 책임한계를 명문으로 규정하여 책임경영의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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