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80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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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김옥균은 1884년 이른바『3일 천하』라는 갑신정변의 주인공이다. 이 정변을 이해하는데는 그 무렵의 국내외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83년과 84년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양의 국제관계에 있어 중대한 파문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제·일 양국과의 관계는 접어 두고라도, 그 밖의 다른 나라들과 상당한 변화를 맞고 있었다.
83년4월에는「한·미 수호 조규」가 비준되고, 10월에는 영·독 양국과의「통상수호 조규」가 수정되었다. 1884년4월에는「한·영 수호 조규」가 비준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조선왕국은 이미『우물 안의 개구리』도, 『금단의 나라』도 아니었다. 이런 사실들은 청·일 양국으로 하여금 그들의 대한정책에 있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한편 우리의 조정 안에서는 청국의 간섭을 놓고 찬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 요인들은 시대의 조류를 타고 거사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우정국개설기념「파티」를 이용해서「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있다. 김옥균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자금·군사 등의 문제를 일본공사에게 의뢰, 확약까지 받았었다.
그러나 거사는 방화사건과 함께『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후세의 사람들이 아직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실패 자체, 아니면 사건 적인 호기심보다는 그 당시의 상황이다. 김옥균은 정변의 성공을 믿고 시정요강까지도 준비했었다. 골자는 사대외교의 지양, 독립주권국으로서의 위신확보, 귀족·양반정치의 전황을 배제하며, 근대 민주주의의 정치질서를 수립하자는 것 등이었다. 한편 가난한 백성의 보호를 강조하고, 탐관오리의 치죄를 약속했었다.
실패의 원인은 분명히 그 시정책의 잘못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 양심적인 정강에도 불구하고 비극으로 끝났다.
이때의 개혁운동에 참여했던 약관의 윤치호는 이런 후일담을 남겨 놓고 있다.
-『당시의 국민 중에는 한 사람도 개화당의 사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과 공모했다는 오해를 사서 역적으로 몰리고 말았다.』
민중의 호응이 없었던 것은 역사의 좋은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 그것은 결국 개혁의 원동력이란 몇몇 지식인의 열정이나 양심만으로는 되기 힘들다는 사상이다.
지식인은 오히려 민중을 각성시키고, 그들에게 신념과 용기와 생의 보람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는 일이다. 용기 있고 의로운 지식인의 그와 같은 노력을 믿고 따르는 슬기 있는 민중이라야 개혁도 할 수 있다.
오늘 3월28일, 김옥균의 80주기를 맞으며 생각나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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