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제11화 등기 마을의 고려 동전 얘기 (2)|제32KD 동북 지방의 한적 문화 탐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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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소립원심조 옹은 「안동씨전말기」비가 서있는 자리에서 서남향으로 멀리 펼쳐지고 있는 넓은 들판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기 저 들쪽을 보십시오. 저 들판 사이를 가로질러 멀리 뻗은 관개용수로가 보이지요. 저 맨 끝엔 7백여년 전에 세워진 「등기언수문」이란 돌 표시가 있는데 거기 달린 수문을 여닫음으로써 지금도 이 고장 4천2백여 정보의 물을 대주고 있습니다.
이 수로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이 자리에 「후지사끼」성을 쌓은 성주 안동씨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 고장에 관개수로를 뚫고, 농업을 정착시킨 것은 그 보다도 훨씬 이전,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술자들이었을 겁니다.

<「안동의 난」 주인공 후손>
「후지사끼」 성주 안동씨와 지금 한국의 경북 안동간에 무슨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곳 안동씨나 그 조상들이 상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와 이 곳에 정착하고 일본 기내의 「야마또」 (대화) 조정과 맞설 만큼 큰 위세를 떨친 호족들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전회에서 언급한 고문헌 『등기 성지』에 따르면, 등기 백조성의 성주 안동씨의 시조는 「고성환」 또는 「안동환」. 그는 일본 연호 천희 5년 (1057), 이른바 『전9년의 역』 【주=평안 말기 대화 조정의 명에 불복하는 육오국 호족 안배씨 일가를 소탕하기 위해 1051∼62년까지 계속된, 전란』에서 주살 당한 안배정인의 둘째 아들이다. 3세 때 간신히 죽음을 면해 이곳 「후지사끼」 지방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재기하여 관치 6년 (1092) 「후지사끼」성을 쌓고 대대로 안동씨라 칭하면서 오주 지방 일대를 다시 지배한 호족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발견된 3개의 고문서 기록에 의하면, 이 고장 「쓰가루」 (진경)란 지명과 『「아베」 (안배)씨』 또는 『안동씨』라는 성 자체가 한국 고어 「동일류」 (쓰가루)·「아비」 등에서 유래한 것이었음이 밝혀져 주목된다.
이곳 「후지사끼」 마을 공민관이 월간으로 내고 있는 공보지 『등소』에 연재되고 있는 향토사가 「후지모또」 (등본광행)씨의 글 <고향의 역사>에서 보면, 최근 (1972)이 고장에서는 문치 2년 (1186), 천문 6년 (1537) 7월12일, 천문 7년 (1538) 8월1일이라고 각각 날짜까지 뚜렷이 적힌 고문서 세통을 발견했는데, 이 문서들은 모두가 상고대 이 고장을 지배했던 「나가스네히꼬」족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호족이었다는 전승을 기록하고 그 묘지의 소재와 발굴을 들을 일일이 밝혀주고 있다.

<「동일류초」에 지명 내력>
일례로, 천문 6년 (1537) 7월12일자로 「십삼포어뢰당총대 기야태낭관자」라는 기록자 성명이 들어 있는 『동일류초』라는 고문서는 이 고장 「쓰가루」 (진경)의 옛 지명이 「동일류」라고 지적하면서 그 내력에 관한 전승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마태국의 왕 「나가스네히꼬노미꼬또」가 「쓰가루」 (진경) 지방에서 군림하기 전부터 이 고장은 「쓰가루」 (동일류)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옛날 진나라 【주=일본 문헌에는 흔히 한국까지를 「가라구니」라 표시하여 중국과 혼동하고 있다】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 나라 군공자의 일족이 난을 피해 새 나라를 찾고자 바다로 나와 동으로 동으로 전진해갔다.
그러던 중 동쪽 햇님이 흐르는 곳에 육지가 있음을 발견, 이곳에 상륙하고 그 지명을 동일류라고 했다. …「나가스네

<「황토족」이라 불리고>
히꼬노미꼬또」는 본래 야마태국 5기7도의 왕이었는데, 신무제와의 왜국에서의 싸움에 패하여 야마오로 도망쳐 나와 보니, 동일류에는 앞서 말한 진나라 군공자 일족이 선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족인 수란이란 낭자와 결혼, 동일류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이래, 장수언·수란 일족은 서로 혼혈, 스스로를 「아라바끼」 (황토)족이라 부르며 동일류의 지배자가 되었다….
장수언과 수란 사이에는 6남 2녀가 있었는데…그들이 각기 동일류의 8개국의 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 황토족의 말윤인 안배뢰시는 오주 전역을 장악, 스스로 「일하 장군」이라 칭하면서 대화 조정을 격파, 자기 조상 장수언명의 야마태국 5기7도의 왕위를 회복코자 했으나 「전 9년」, 「후 3년의 역」에서 패퇴, 그 대망이 꺾이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동일류에서 출세한 것이 안동십낭 고성환인데, 그 이래 안동씨는 오래오래 이곳 동일류에 군림하게 된 것이다…』

<한일 관계사에 새 열쇠>
여기 상당히 긴 인용을 한 젓은 이 고문서 안에는 「나가스네히꼬」가 야마태국 5기7도의 왕이라는 놀라운 표현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일족 황토족이 일본 동북 지방 오지에 정착해서 살게된 연유를 신화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 부문이 상고대 한·일 관계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야마태국이라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의 사서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초창기 「야마또」 정권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소재지가 지금의 북구주냐 또는 근기·나량 지방이냐 하는 문제가 상고대 한·일 양국의 관계사를 해명하는 중요한 열쇠로서 논의의 초점이 되어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 국가 형성 초창기에 있어서의 지배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건너간 몇 갈래의 북방계 호족들로서 그들 사이의 세력 다툼과 경이 곧 전기한 장수언의 동북 이주를 포함한 일본 건국 신화의 뼈대임을 상기할 때, 고대 「에조」의 수수께기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준 이 새로운 전승의 발견은 초기 대화 조정 형성 과정과 상고대 한·일 관계사 해명에 새로운 하나의 열쇠가 됨직도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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