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 연령층」|이 세대에 손길을|사회환경개선을 위한 「시리즈」(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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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평쯤 되는 사무실 안에 두개씩 맞붙인 책상13개가 두 줄로 놓여있다. 상오8시, 아직 이른 아침이라 직원들은 출근하지 않았다. 사환 김모양(18·서대문구 연희동)은 이때부터 직원들이 출근하는 상오9시전까지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서류며 「메모」지를 간추려놓고 바닥을 쓸고 책상 위를 말끔히 물걸레로 닦아 놓아야한다.
두달전 서울 종로구 경운동K회사에 사환으로 들어온 뒤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의 하나가 이 아침청소. 신경질적인 여직원 L씨(35)는 출근을 하면 으례 손가락 끝으로 의자와 책상을 쓸어보곤 먼지가 묻어 나오면 발끈한다. K씨(30)는 자기 책상 위에 놓아둔 서류에서 1장이 뜯겨 없어졌다고 김양에게 야단을 치고, C씨는 의자가 다른 책상에 가 있었다고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지 않으려고 김양은 1시간 먼저 출근한다.
이 사무실에는 우편물발송이 많다. 김양은 인쇄물을 봉투에 1장씩 넣고 주소를 적었다.
우체국에 가려고 막 문을 나서는데 P씨가 부른다. 『은행에 가서 돈좀 찾아오라.』 예금통장에서 1천원, 2천원씩 찾는 매일 있는 심부름이다. 대답도 채 하기 전에 과장이 또 찾는다. 『「미스김, 차좀 가져와.』 과장 옆에는 손님2명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 얘기중이다.
김양이 간막이가 쳐진 주방에 들어가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을 때 『얘, ×월×일자 ○○신문 좀 찾아와. 』 C씨가 다급하게 서두른다. 신문철을 뒤적이는데 P씨는 『돈을 찾아왔느냐』고 묻는다. 아직 못갔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너는 뭘 시키면 왜 그렇게 행동이 느리냐. 말을 들어먹어야지.』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콧잔등에 찡하게 울려온다.
한나절을 이렇게 들볶이면서 매일 찻길을 2번 건너 4백m쯤 떨어진 은행에 4∼5번, 1백m쯤되는 우체국에 3∼4번씩 쫓아다니고 때로는 시내「버스」를 타고 명동까지 심부름하는 것이 김양의 일과. 그러나 이것은 약과다.
사무실 구석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고 나면 어디 어디에 전화를 걸어 누굴 바꾸라는 등 직원13명의 호출이 그치지 않는다. 『구두닦이 좀 불러와라.』『얘, 내「오바」갖고 와라』고 말할 때는 그저 외출할 일이 너무 바쁘니 저러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옆의 책상 위에 있는 풀이나 신문을 가져오라는 여직원의 심부름을 할 때는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것. 『직장에 있는 한 미움을 받을 수 없으니 그래도 겉으로는 웃는다』고 김양은 말한다. 남에게 너무 시키기만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 지난해 봄 고혈압으로 앓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큰오빠는 군에 입대하고 작은오빠는 편물기계공장의 기능공으로 일자리를 구해 나섰고 김양도 S여고1년을 중퇴하고 말았다.
김양은 월급 8천원으로 광화문근처의 모학원에 등록,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
하오6시 퇴근해서 9시 반까지 학원공부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피곤하다는 것. 사무실에서 크게 야단이라도 맞은 날이면 밤늦게 집에 들어서자마자 죄 없는 어머니에게 공연히 짜증을 부리게 된다는 김양의 말이다.
중구무교동의 모 개인회사에 근무하는 이모군(17)은 회사일에 대한 책임 때문에 항상 걱정이다. 5명밖에 안되는 직원이지만 「캐비닛」에 든 서류를 꺼내고 챙겨두는 일을 도맡아하다시피 한다는 것. 어떤 때는 자신이 둔 서류를 빨리 찾아내지 못해 욕을 얻어먹기도 한다.
책상 위에 「메모」종이를 놓아뒀다가 없어지거나 서류를 팽개쳐놓고 퇴근했다가 다음날 흩어져 있거나하면 꾸지람은 이군에게 돌아가기 마련. 때로는 상사에게 야단맞은 직원이 『너는 일을 시킨대로 하지 않는다』는 등 이군에게 분풀이까지 한다는 것이다.
저녁7시가 지나 직원들이 퇴근할 때 마지막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군에게 또 잔소리다. 『불 잘 끄고 문단속 잘해라.』 이군은 매일 되풀이하는 이 말이 무척 듣기 싫단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에게 책임 지우려는 듯이 들리기 때문이다.
사환생활 1년 남짓, 한달에 7천원씩 받는 이군은 사무실 청소를 마치고 「키」를 수위에게 맡긴 뒤 하루 일을 끝낸다. 『잘못이 있으면 부드럽게 타이르는 것이 어른이 아니냐』는 것이 그의 말이다.<이기영 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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