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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의 허술한 위헌론과 비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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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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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새누리는 새로운 세상이란 뜻의 우리말입니다. 새누리당이 보수적 성향이긴 하지만 새것을 추구하겠다는 정신은 사줄 만합니다. 입으로 진보를 외치면서 발로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위장 진보가 많은 시대이니까요. 그런데 새누리당이 이른바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자꾸 말을 뒤집는 건 봐주기 어렵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운동을 하던 2012년 11월 6일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모두 바로잡겠다. 기초단체의 장과 의원의 정당 공천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동영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박 대통령 특유의 또박또박 생각을 심는 듯이 말하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시장·군수·구청장과 시·군·구 의원을 뽑을 때 특정 후보를 공천하지 않겠다는 ‘기초선거 공천 폐지’는 당시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기초’라든가 ‘공천’이라는 말이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초선거 공천폐지’ 공약은 ‘경제 민주화’만큼 파괴력이 큽니다. 경제 민주화가 재벌을 치는 거라면 공천 폐지는 정당을 치는 겁니다. 공천 폐지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 정치를 분열과 증오, 오만과 부패, 폭력과 저질의 세계로 타락시킨 새누리당(전신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정치를 오염시킨 주인공들이 책임을 통감하고 특권의 일부를 삭감하겠다는 반성문이었죠. 이 양대 정당은 서로 싸우면서도 공천제를 통해 국가의 최고권력과 입법권력, 지방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독점해 왔습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1조)는 한국의 헌법은 정당과 국회의원에게 유난히 큰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정당의 운영 예산을 지원해주는 문제까지 시시콜콜 규정할 만큼 자비롭지만 그에 대해 지우는 의무는 그저 민주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정도(8조)입니다. 국회의원은 불체포특권, 면책특권(44조, 45조)으로 입법자라기보다 초법자 같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양대 정당과 소속 국회의원들이 누리는 이 막대한 특권의 영토 가운데 지방권력, 그중에서도 광역자치단체 이상은 말고 그 아래 기초단체의 공천권만 삭감하자는 게 ‘기초선거 공천 폐지’의 정신입니다.

 새누리당이 이 정도 권한조차 내려놓지 못하겠다며 위헌론까지 들고 나오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새누리당이 제시한 위헌론의 근거는 2003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입니다. 그런데 결정문을 잘 읽어 보셔요. 헌재의 결정은 기초의원 후보자가 정당을 표방하지 못하도록 한 공직선거법 84조가 위헌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결정에 “정당의 영향을 배제하겠다는 입법의도는 정당성이 의심스럽다”는 대목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당공천금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위헌결정한 적은 없습니다.

 새누리당 위헌론의 또 다른 근거는 정당이 공천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헌법이 8조에서 보장한 복수 정당제, 정당 민주주의, 평등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들입니다. 기초단체에 무공천한다고 해서 복수 정당제나 정당 민주주의가 얼마나 타격을 입을 것 같습니까. 이런 주장들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기초선거에서 무공천한다고 해도 여전히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와 광역선거에서 막강한 공천권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정당의 문제는 ‘과소 자유’가 아니라 ‘과잉 특권’에 있음을 잊지 맙시다. 정당과 국회의원의 특권 축소는 지난 대선 이래 시대정신 아니겠습니까.

 새누리당이 허술한 위헌론으로 공천폐지 공약을 뒤집으려는 진짜 이유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추억 때문일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당시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82대92로 민주당에 참패했습니다. 지방권력에서만큼은 민주당이 여당이고 새누리당이 야당인 셈이죠. 이번 6월 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이 폐지될 경우 기초단체장 수가 많은 민주당은 새누리당보다 현직 프리미엄이 더 많을 겁니다. 바로 이 점이 민주당은 공천 폐지를 주장하고, 새누리당은 공천 폐지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새누리당의 정신구조 속에 숨어 있는 비겁한 일면입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