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 외부 세계에 이렇게 밀송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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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닷새 낮 나흘 밤 동안 피의자는 심문관 앞에 서 있었다. 소련의 국가 안보 기관인 KGB의 수사관들이 갖은 술수를 다해가며 솔제니친의 친구인 엘리자베타·보로니안스카야 여인을 얼러댔으나 막연한 대답을 얻을 뿐이었다. 그러나 KGB 수사관들은 지칠 줄 몰랐다. 되풀이하여 『수용소군도』 원고의 소재지를 대라고 다그쳤다. 이미 1969년 초부터 모스크바에는 솔제니친이 소련체제에 대해 유례없을 만큼 날카롭게 비판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작품의 제목 자체가 그 내용을 말해주고 있었다. GULLAH란 바로 유형지 수용소를 총괄하는 기관인 Galvnoje Upravaenije Lagerej 의 약칭이었던 것이다.
솔제니친이 이 기록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원고를 은밀한 곳에 숨겨놓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읽히지 않았다. 작가는 입버릇처럼『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될 때』만 이를 출판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위험할 때 저서출판>
그러나 원고는 이미 서방으로 밀송됐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 출판사가 출판권을 얻어 뉴요크의 어느 은행 금고에 보관중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솔제니친 자신은 이러한 풍문에 대해『신경질적으로 대경실색』해 왔다고 타임지가 1970년 5월호에서 보도하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원고의 존재조차 부인하기를 친구들에게 부탁하곤 했었다.
그러나 KGB의 끈질긴 추격은 실마리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1973년 8월 솔제니친에게서 일부 원고의 은닉을 부탁 받은 엘리자베타 여인을 레닌그라드 KGB의 심문대 앞에 불러 세웠던 것이다.
심문 닷새 째 기진 맥진한 여인은 원고가 숨겨져 있는 곳을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KGB는 원고를 수중에 넣을 수 있게 됐다. 엘리자베타는 풀려 나온 후 자택에서 목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료 제공 인질 공개>
솔제니친에게 KGB의 손길이 죄어들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집이 수색 받고 몇몇은 체포되기까지 했다. 분산됐던 원고들이 압수되는가 하면 가브리엘·스페르핀이라는 친구는 KGB의 감방에서 사라졌다. 결단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원고에는 자료를 제공하며 증언해 준 2백 27명에 이르는 인물들의 이름이 약칭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솔제니친은 이를 공개함으로써 그들을 KGB의 손길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73년 9월 솔제니친은 스위스 취리히의 변호사 프리츠·헤프 박사와 연락을 취했다. 헤프 박사는 70년 초부터 그가 전서방 세계에 대해 자신의 자작권을 의뢰해 온 인물이었다. 솔제니친에게서 어떤 방법으로 의뢰 받았는지 헤프 박사는 물론 밝히지 않고 있다. 헤프 박사는 사회 민주주의자로서 소련내의 자유파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의뢰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수용소군도』의 원고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입수됐는지에 대해서는『원고 뭉치로서가 아니라 아주 평상적인 화물』을 가장해서 나왔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불분명한 점이 몇 가지 있지만 헤프 박사가 이 일을 예견하고 몇몇 출판사를 벌써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셰르츠 사와 계약>
그는 이미 스위스 베른의 슈트라이트·셰르츠 출판사에 대해 독일어역 판권을 제의하고 시역판 원고 200페이지를 넘겨주었다.
71년에는 서독의 루흐디한트 출판사에서『1914년8월』을 출판했었으나 『수용소군도』의 독어 판은 셰르츠만이 출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동시에 미국(하퍼·로사), 영국(콜린즈), 프랑스(스윌), 스웨덴(발스트룀·비스툰드) 의 출판사들과 계약을 추진했다.
셰르츠사가 진정된 것은 스위스 출판사를 원했던 솔제니친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헤든 박사 자신도 일을 신속히 추진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가까이 있는 출판사를 생각하던 참이었다.
소련당국의 예방 조치를 피하기 위한 비밀을 지키도록 각출판사들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었다. 소련어 판권은 파리에 있는 소련의 종교적 망명출판사인 YMCA 프레스 사에서 획득, 가장 먼저 출판하도록 계획을 추진했다. 아울러 담배곽 크기의 초 미니판도 출판을 서둘렀다.

<4명이 은밀히 작업>
비밀 출판 작전은 완전무결하게 이루어 졌다. 지난해 10월 25일 셰르츠사는 안나·페투르니히라는 가공인을 저서로 한 원고를 넘겨받았다. 세르츠사에서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장, 편집장 등 4명만이 작업을 진행시켰다.
11월 1일부터 4주간 동안의 숨바꼭질이 시작 됐다. 출판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인물을 고용하여 교정 작업이 이루어져 12월초에는 울름 에브너 인쇄소에 인쇄를 넘겼다. 별도로 출판을 추진 중이던 소련작가 블라디미르·막시모프의 이름을 빌어『막시모프 2세』라는 서명으로 인쇄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73년 말이 되기 조금 전에 인쇄는 마지막 교정을 끝냈다. 최후 순간에 서명과 저자명도 수정되어 1월말에 초판 5만부를 발행할 수 있도록 준비가 완료됐다. 『될 수 있으면 널리 이 책을 보급시키는 것이 솔제니친의 간절한 희망』이기 때문이다(헤프 변호사담). 구어판은 6백 8 페이지의 페이퍼·백으로 출간될 예정이다.<슈피겔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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