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인 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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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예수는 자기가 곧 진리라고 말하였다. 고로 당시 유대총독으로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였던「빌라도」는『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하고 부르짖었다. 「빌라도」의 이성으로서는 아무리 보아도 예수가 이단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는 진리의 화신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방황하는 마음을 따뜻하게 인도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반사회적인 인물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던 예수를 가장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처형했던「빌라도」로서는 예수의 주장에 그만 곤혹을 느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환경조건이나 또는 사회적 지위 등은 그로 하여금 정신적 진리에 도달키 위한 지식을 배양할 만한 능력을 갖추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오류를 두려워하는 논리적 진리에만 급급하도록 했다. 하기야 논리적 진리의 노예가 된 자는「정신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정신적 진리는 허위를 단연코 배척하는바 논리적 진리야말로 인간이 이성이 흐려질 때(또는 인간이 그의 이성을 고의적으로 흐리게 하려고 들 때) 허위의 아들로 둔갑을 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적 진리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흐르다 보면 오류의 물 속에 잠겨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진리와 논리적인 진리사이에서 조금도 평형을 깨뜨리지 않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이상으로나마 바라는 목표인 것이다.
여하간 참다운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예수는『내가 곧 진리』라고 말했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이의를 표시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광신자가 아닐지라도 예수이기 때문에 진리를 말하고 행했다 하는 점에 절대적인 수긍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아들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많은 수가 정신적 또는 논리적인 진리의 영역을 종횡무진 하면서 비진리의 먼지를 피우고 있다. 그것은 진리가 가장 먼 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진리를 두려워하는 자는 진리가 한없이 멀어 보이고 진리를 가볍게 보는 자는 자신이 이미 진리의 울타리 속에 들어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논리적 진리 속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즉「그들의 진리」속에서 오류를 발견하였을 때 그들은 그들의 과오를 수정할 가능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하기야 오류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과오를 시인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진리 속에서 횡포를 부리는 자는 설사 자기의 생각이 허위로 드러났다 할지라도 좀처럼 그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진리이다, 허위이다 하는 판단은 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하여 명확한 개념을 갖지 못하고 있는 뭇사람들은 진리에 아첨하고 허위에 굽실하면서 삶의 물결을 헤쳐 나가고 있다. 진리에 요령을 양자로 바치면서 말이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빌라도」의 의문이다. <장선영 외대 스페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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