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 동은 이재학형|유진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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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은 형!
이게 웬일이오 술은 애초부터 별로 안 했지만 즐기던 담배도 끊고 노익장의 원기로 낚시를 즐기던 형이 청천벽력으로 세상을 떠나다니!
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하루에도 몇씩 되지만 왜 하필 형이 그 축에 끼어야 한단 말이오?
죽마고우라는 옛말이 있지만 내가 형과 사귄지도 벌써55년-종생의 마음의 친구가 이렇게 갑자기 가다니, 이런 허무한 일이 또 있을 수 있소
동은 형!
형과 나 사이인지라 지금 이 시각에 형에 관한 나의 사사로운 추억을 더듬는 것을 용서하시오. 형의 인물이 어떻다 경력이 어떻다 하면서 제법 조사 같은 것을 쓰는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쑥스러우니 말이요.
기미년 3·1 운동이 터진 직후에「경성고등보통학교」에 같이 들어간 우리가 방이 다르면서 처음에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없소.
그러나 그 이듬해에는 우리는 벌써 둘도 없는 친구였소. 아니, 형이 나의 형님 격이었지.
신간서적을 한꺼번에 수 십 권씩 사다 쌓아 놓고 내리읽는 형은 나에게 문학에 대한 흥미를 불질러준 선배이기도 했소.
3학년말에 동맹휴학이 일어났을 때에는 나는 표면상의 대표로 이리저리 뛰어 다녔지만, 복면의 수괴는 실상 형이 아니었소
대학상과 때 내가 관계해서 열려는 음악회에 검도부·유도부의 일인 학생들이『신성한 강당에 여자를 들일 수 없다』고 들고일어나서 학생대회가 되었을 때, 일장연설 끝에 허허허 하고 웃어젖힘으로써 장면을 수습해준 것도 형이 아니었소
생각하면 그것이 후년 유명해진 형의 너털웃음의 시초였던 것 같소.
동은 형!
일본헌병대에 붙들려 한달 동안이나 갖은 고문을 다 당하는 고초를 겪은 후 형은 고향 선배의 권고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형 같은 공무원은 전무후무할 것으로 아오.
출퇴근시간도 안 지키고 책상 앞에 제대로 붙어 앉았지도 않는 공무원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런데도 그 까다로운 일인상관들이 형에게는 감히 손찌검을 못했지?
꾸밈새 없는 그 너털웃음 나는 형을 생각하면 언제나 황희 황 정승을 연상하오.
단양군수로 해방을 맞이했을 때 군민들은 형을 붙들고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켜달라 애원하다시피 하지 않았소?
동은 형!
세상에는 형을 가지고「무골호인」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호인」은 몰라도「무골」이라니 천만의 말씀.
부산에서 대통령과 국회가 충돌해서 억지 계엄령이 나오고 폭력배가 난무 할 때, 쌀 한 톨 없는 가족을 내버리고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소신을 굽히지 않던 형의 경력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오.
여러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하고 여당중진으로서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던 때가 형에게 있어서는 현세적「출세」의 절정이었을 것이오.
나로서는 아닌게아니라 그때가 제일 걱정스럽게 생각되던 때였소.
어느 날 나는 느닷없이 형을 찾아가서『부의장, 잘해주게. 다만 한 가지, 지금 자네들은 여당의원 백 수십 명이 굉장한 것으로 알고있을지 모르지만, 이대통령 한사람의 비중이 99%가 넘는데 대해 자네들은 모두 합친대도 1%도 안된 다는 사실만 잊지 말아주게.』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던진 일이 있었지.
대 여당의 간부인 형은 그때에도 그저 허허 웃고 듣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오.
동은 형!
그것도 벌써 옛날 이야기. 4·19후 형은 당연히 자유당 간부의 한사람으로서 여러 가지로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그런 일은 깨끗이 씻어져버리다 시피 하였으니 그것은 어찌된 일이겠소
아니「이재학」하면 누구나「탈속한 대인」,「너그러운 큰 형님」으로 아는 것이 상식 아니겠소
생존경쟁은 나날이 가열화하고 인심은 메말라서 무엇보다도 마음의 윤기와 여유가 아쉬운 이 때 형이 가시다니 안될 말이오!
꾸밈새 없는 그 너털웃음을 좀더 오래 이 강토의 하늘에 울려주었어야 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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